비정규직 철폐 구호를 외치지만, 막상 알바를 하며 고생하는 친구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던 경험. 한 활동가는 운동을 접해본 적 없는 사람과 대화를 하려고 하니 말을 더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했다. ‘말’이 어려워서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익숙하게 사용했던 ‘말’이 사람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줄 만한 내용을 담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움직이고 싶다, 그러나 …… 견고하고 막막하다. 11회 인권활동가대회에서 ‘노동’에 대한 토론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사람답게 먹고살기 위해 ‘노동’의 문제에 주목해야 하고 인권운동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절박함은 있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노동권’이나 노동운동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품지 못한 채 저 홀로 견고하고, 그러나 인권운동은 어디에서 어떤 이야기들을 펼쳐야 할지 막막한 현실. 다양한 활동을 통해 ‘노동’을 고민하는 인권활동가들이 토론방으로 모였다.
청소년노동인권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노동운동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청소년 야간노동 금지 기자회견을 열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인권활동가들은 또 다른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청소년이 구할 수 있는 일들 중 야간에 하지 않을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편의점, 커피숍, 헬쓰뷰티샵, 배달 등 청소년들이 하게 되는 많은 일들은 야간에 이루어진다. 시급도 낮고 노동조건도 훨씬 열악한 일들을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은 물론 안타깝다. 그러나 야간노동을 금지하라는 주장은 청소년들이 일을 구하는 것 자체를 어렵게 만든다. 청소년이 일하는 것을 구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뿌리 깊은 보호주의가 먼저 작동한 결과다. 다양한 ‘노동’이 이루어지고 있는 복잡한 현실을 살피는 데 운동은 여러모로 서툰 듯하다.
최근 평화박물관 사태 역시 비슷한 문제를 드러낸다. 운동진영 안에서 ‘노동’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오히려 쉽지 않다. 일을 하는 사람이, 일을 통해서 즐거울 수 있도록, 의미 있는 관계들을 만들어갈 수 있도록, 함께 기울일 수 있는 노력이 무엇인지 묻는 게 참 어렵다. 때로는 대의를 앞세워서, 때로는 상황의 어려움을 핑계로, 희생이 강요되기도 한다. 대개의 경우 조직 안에서의 위계는 문제를 함께 풀어가기 어렵게 만든다. 노동법에 명시된 ‘노동권’으로는 일하는 사람들에게 보장되어야 할 권리가 무엇인지 충분히 설명되지 않고 현실에서 미끄러진다.
인권운동 안에서도 ‘노동권’은 그리 잘 다뤄지지 않았던 권리영역이다. 다른 권리에 비해서 오히려 일찍 제도화된 권리이기도 하다. 20년 넘게 활동한 인권활동가의 고백도 있었다. 노동권은 노동법학자들이 하는 것이었고, 인권운동은 노동권에 충분히 관심을 기울이지 못해왔다고. 그런데 막상 노동권이 더욱 절박해지는 현실에서, 기존의 노동권은 고용된 노동 이상의 노동을 상상하지 못하고 정형화된 틀에 갇혀 있어서 난감하다고. 보편적 권리로서의 노동권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며 그는 말을 맺었다. 이와 같은 현실은 한국 사회의 변화와 맞물려 있다. 전 세계적인 변화이기도 하다. 신자유주의적 경제구조 재편은 수많은 불안정노동을 낳았다. ‘정규직’이라고 부를 수 없는 다양한 노동 형태가 확산되고 있다. 그런데 기존의 노동법체계는 ‘정규직’을 근로계약 관계의 모델로 삼는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다양한 ‘비정규직’이 등장하면서, 기존의 노동법체계가 상정하는 모델이 ‘정규직’이라는 말로 통용되기 시작했다. 1년만 계약하고 계약 해지당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는 노동법 안에서 자리를 찾기 어려웠고, ‘해고’는 계약 해지의 부당함을 뒷받침하는 말이 되기 어려웠다. 그 자리를 만들려고 각종 틈새를 벌여보지만 쉽지는 않았다.
이런 틈새에서 ‘노동인권’이라는 말이 사용되기도 한다. 한 활동가는 인권이 ‘노동권’에 묻어 있는 불온함을 감추는 몹쓸말이 되어버렸다고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존의 언어로 주장하기 어려운 삶에 대한 기대, 안정적인 노동에 대한 기대를 주장할 수 있는 언어를 기다리며 ‘노동인권’을 소중하게 부여잡고 있는 활동가도 있었다. 그 자리가 인권운동이 ‘노동’에 직면하고 도전해야 하는 자리가 아닐까. 이것은 법제도가 보장하는 권리의 ‘언어’에 대한 문제 이상이다. 다양한 노동의 형태는 모종의 독립성을 낳기도 한다. 알바를 하는 청소년들의 가장 호쾌한 저항은 연락 없이 안 나가버리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독립성과 동시에 생기는 새로운 종속성을 보여주는 모습이기도 하다. 가게 주인 한 명은 골탕 먹일 수도 있지만, 비슷한 조건의 알바를 전전할 수밖에 없는, 다른 삶의 기획을 시도하기 어려운 조건. 현실과 희망의 괴리가 너무 커서 결국 아무 것도 희망할 수 없게 되는 굴레만 남는다. 권리의 ‘언어’뿐만 아니라 어떻게 함께 싸울 수 있을지를 궁리하는 것이 더욱 필요한 이유다.
토론 중에 한 활동가는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해고는 살인이다”라고 말할 때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여성도 저 말을 쓸 수 있었을까. 언제나 피부양자로 여겨지고, 부부사원을 해고할 때에도 여성이 먼저 해고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이 사회에서, 여성의 해고도 살인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수많은 노동의 형태만큼이나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노동’을 본다는 것은 그에 앞서 ‘사람’을 볼 때 가능해질 듯하다. 청소년은, 장애인은, 여성은 어디에서 어떻게 일하고 있을까. 아니, 이런 정체성으로 호명해서만은 안 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불안정노동의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인권은 다른 곳이 아니라 그이들의 일상에 있다. 우리가 닿아야 할 먼 이상일 때 인권은 실현될 수 없다. 우리 안에 이 세상 있다는 감각이 생길 때, 저마다 서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가진 전략들이 모일 때, 세상은 달라지는 것 아닐까. 노동권, 노동조합 등의 말에 갇히지 않고, 그 말을 낳았던 인권의 역사와 사람들의 삶을 기억할 줄 아는 인권운동의 힘을 믿고, 일단 움직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