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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류은숙의 인권이야기

시간을 계획하고 싶다


어릴 적 자주 그리던 동그라미 생활 계획표가 그립다. TV보는 시간, 숙제하는 시간, 집안 일 하는 시간 등을 색연필 한 통을 다 꺼내놓고 색칠하면서 새로운 계획에 대한 자신감에 차서 뿌듯해 했었다. 사흘도 지키지 못하고 또 다시 그릴지언정 ‘나의 시간’에 대한 ‘나의 계획’은 아주 자유롭고 즐거운 작업이었다.

불행히도 어른이 된 이후의 형편은, 특히 인권운동을 하면서의 형편은 ‘계획’과는 거리가 먼 생활이다. 계획된 일들은 항상 뒷전에 밀리고 무리하게 끼어 든 일이 무리한 생활을 채찍질한다. 계획된 일들이란 소재 발굴에서부터 공을 들이는 일이고, 장기적인 연구조사가 필요하고, 많은 사람들의 참여를 염두에 두기에 ‘열 사람의 한 걸음을’ 위해 호흡을 조정하면서 해야 하는 일들이다. 무리하게 끼어 든 일들은 이런 계획을 난폭하게 할퀴고 찢어 놓는다. 도무지 계획표를 다시 그리고 싶지 않을 지경으로 말이다.

계획의 훼방꾼은 대개 정부 당국의 기습적이고 비공개적인 행태가 만들어낸다. 불과 10일간의 예고 기간을 두고 보름 남짓 남은 국회 회기 내에 처리하겠다며 국정원이 돌연 발표한 ‘테러방지법안’은 가장 최근의 기막힌 예이다. 검증할 기회는커녕 하마평에 오른 인물조차 없다가 일방적인 명단 발표로 끝낸 인권위원 인선은 국가인권기구의 초석을 놓는 단계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이런 식의 당국의 기습발표와 배짱 집행을 관망할 수 없기에 그에 따라 기수를 돌려야 하는 건 고역이다. 하던 일 접고 피켓 만들어 거리로 나서야 하고, 밤새워 시험 공부하듯 분석을 해야하고, 이런 저런 보도문과 성명서를 써내려 가면서 계획표엔 기약 없는 보류의 밑줄이 그어진다. 방향을 알 수 없는 난파선 위에서 항해하고 있는 아찔함을 느낀다.

몇 년 전 이맘 때 외국의 한 인권단체에서 연수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일찌감치 완성한 다음 해 캠페인 기획을 놓고 예산 배정을 위한 장시간 토론을 하고 있었다. 이후 9개월 동안 지켜본 그들의 계획표엔 인정사정 없이 끼어 드는 예측불허의 일들이라곤 없었다. 그들의 말끔한 건물과 풍부한 자원에 대해서는 시큰둥하던 나에게 부러움을 갖게 한 요소였다.

‘졸속추진, 밀실추진, 날치기통과’에 멍이 드는 게 어디 인권운동가의 계획표 뿐이랴. 당국의 행태는 예측 가능한 사회에 살고 싶은 국민들의 소망을 짓밟는 일상의 테러이다. 나의 시간을 계획할 자유를 누리고 싶다. 인정사정 없이 끼어들지 말라. 방향을 알 수 없는 ‘위험사회’를 벗어나기 위해 정부는 제발 예측가능한 방향으로 일을 도모하라.

(류은숙씨는 인권운동사랑방 사무국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