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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오두희의 인권이야기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새해가 왔다. 새롭고 희망찬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현실이 그렇지 못하니 우중충한 이야기를 꺼낼 수밖에 없다.

2003년 12월 29일 오후9시 뉴스를 본 사람은 기억하리라! 수구반동이라 할 수 있는 농촌 출신 국회의원들이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비준안 통과를 막기 위해 의장 단상 앞까지 나와 용감무쌍하게 싸우는 모습을. 의원직이 걸렸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이들의 강한 반발로 한-칠레 비준안은 유보되었다. 그런데 이들은 이라크 파병안, 소파 비준안 등 굴욕적인 한미관계를 적극적으로 찬성한 자들이다. 그리고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체제를 신봉해 왔던 자들이다. 하지만 신념보다는 밥그릇이 더 중요했던 모양이다.

이들 말고도 밥그릇이 중요했던 사람들이 또 있었다. 소위 민주주의를 신봉하고 이를 지키기 위해 투쟁해 왔다는 국회의원들이다.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집시법 개악안이 상정되었지만 무사히 통과되었다. 일부 소극적인 반대 표시가 있었지만 한-칠레 비준안이나 선거법 통과와는 너무도 대조적이었다. 악법을 저지시키려는 의지가 없었던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도 마찬가지다. 인권관련 법안은 국가인권위에 통보, 협의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정부는 어떠한 사전 통보도 없이 집시법 개악안을 국회에 상정했다. 이에 강력히 대처했어야 할 국가인권위도 국회의장에게 반대의견을 표명하는 것 이외에는 어떠한 역할도 하지 않았다.

이번 집시법 개악으로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과 반미집회는 큰 장벽에 부딪히게 됐다. 이는 결국 초국적 금융자본이 주도하고 미국이 앞장서는 시장권력과 주한미군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꼴이 되었고, 인권은 질식상태에 처했다. 인권운동가들은 '국회가 인권을 짓밟았다'고 말하지만, 더 정확히 말해 그 중심에는 노무현이 있고, 이를 옹호하는 국회의원과 자신의 임무를 저버린 국가인권위가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하여 인권을 짓밟은 것이다.

집회와 시위는 시민의 권리를 지켜내는 중요한 장이다. 사회적 약자가 자기 의사를 밝히는 가장 기본적인 수단이다. 힘없는 자들의 목소리를 듣기 싫어한다면 그 자체로도 권력자의 폭력이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성과로 현행 집시법이 만들어졌지만 해가 갈수록 개악되더니, 급기야 정권 획득을 둘러싼 더러운 정치인들의 싸움 속에서 '집회·시위 금지법'이 탄생된 것이다. 너나할 것 없이 권력자들은 수십 년간 몸에 밴 독재의 망령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이를 숭배하며 집단적 대물림을 하고 있다.

인권을 외면하거나 무시하는 정권은 그 정당성을 잃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우리는 개악 집시법에 불복종하는 투쟁을 벌여나갈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새로운 형태의 리더십과 사회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이 시대의 긴급한 진실이 무엇이며, 어떻게 자본주의 삶의 방식을 극복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을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 더 이상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는 그만두자!

(오두희 님은 평화유랑단 '평화바람' 단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