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인권위원회 초대 상임위원이었던 유시춘 씨가 임기가 채 끝나기도 전 사퇴서를 던지고 열린우리당 비례대표 공천을 신청했다. 그의 낯뜨거운 행보는 인권위원이라는 자리가 한낱 '금뱃지'를 달기 위한 경력으로서만 필요했던 것인지 의구심을 자아낸다.
그의 행보는 이미 2002년 말 유현 상임위원과 함께 인권위원의 퇴직 후 공직 취임을 2년간 제한했던 국가인권위원회법 11조에 대한 헌법소원을 제기할 때부터 예상되었던 바다. 헌법재판소는 지난 1월말 때마침 이 조항에 대한 위헌 결정을 내려 그에게 날개를 달아줬다. 아니 그보다 훨씬 이전, 86년 민가협 초대 총무를 역임한 것 이외에는 인권분야에서 듣도 보도 못했던 그가 당무위원으로 재직했던 전 새천년민주당의 추천을 받아 느닷없이 인권위원으로 등장했을 때부터 그의 길은 예정돼 있었는지도 모른다.
유 씨가 인권위원 재직 당시 자신을 추천했거나 공천을 신청하고자 하는 정당의 눈치를 보았는가 하는 문제는 오직 자신만이 알 일이다. 하지만, 이번 일로 인권위의 도덕성은 치명적 손상을 입게 됐다. 보수언론들은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는 인권위의 결정이 나올 때마다 '특정 정당 편들기'라는 의혹으로 인권위를 흔들어댈 것이고, 비록 '시정 권고'밖에 할 수 없으나 높은 도덕성과 정치적 중립성을 무기로 다른 국가기관의 권고 수용을 강제해야 할 인권위의 영향력도 그만큼 약해지게 됐다. 금뱃지 한번 달아보겠다는 이들이 인권위원 자리에 줄을 서고 임기가 끝나기도 전에 철새처럼 정당으로 날아가는 웃지 못할 형국도 이어질 것이다. 한 언론을 통해 밝힌 바대로 설령 그가 국회에 들어가 인권 신장을 위해 활동한다 하더라도 그의 행동이 끼친 해악을 씻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인권위는 높은 도덕성과 중립성, 국민의 신뢰를 바탕으로 권력기관을 견제하고 국민의 인권 의식을 제고함으로써 인권침해를 예방해야 할 막중한 책임을 안고 있는 국가기구다. 그런 인권위가 '안'으로부터 자신의 도덕성을 허무는 일은 없어야 한다. 유 씨는 공천 신청을 철회하고 열린우리당도 심사 대상에서 그를 제외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또한 올해 예정된 2기 인권위원 선임과정에서도 별다른 검증과정 없이 자격없는 이들을 밀실에서 인선하는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법을 뜯어고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