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추가파병을 결정했을 때 가장 놀라왔던 점은 침략전쟁을 부인하고 국제평화주의를 천명하고 있는 우리 헌법에 대한 어떠한 고려도 없다는 것이었다. 정부는 헌법의 명령을 명시적으로 무시하였고, 여기에 국회는 포괄적 동의를 해주었으며, 헌법재판소는 시대착오적인 통치행위론까지 내세우면서 파병 결정을 정당화했다. 이쯤 되면 권력분립의 원칙이 무색하게 국가권력이 일치단결하여 헌법파괴행위를 한 것이라고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파병 문제에 관한 한 탄핵정국에서 나타난 것과 같은 전 국민적 저항은 보이지 않는다. 수십만의 촛불시위와 총선에서의 심판으로 이어진 탄핵과는 달리, 파병 결정에 대하여 파병 무효와 평화 수호를 외치는 목소리는 여전히 미약해 보이고, 심지어 총선에서도 파병 문제는 아무런 쟁점조차 되지 못했다.
그러나 사실 파병 문제는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이다. 대통령의 탄핵소추가 야기하는 공백은 제도적으로 어느 정도 막아낼 수 있지만,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베트남전 파병의 파괴적 영향을 돌이켜볼 때 파병이 가져올 손실-평화정신의 소멸, 침략국이라는 국제적 낙인과 평화적 생존권의 파괴 등-은 거의 회복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탄핵소추가 대통령직선제라는 하나의 헌법 '제도'에 대한 부정의 의미를 갖는 것이라면, 파병은 국제평화주의라는 헌법 '원리'의 부정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파병 문제는 단순한 정책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 대한민국 헌법의 명령에 관한 문제이다. 굳이 이라크의 재건을 내세운다면 점령군이 철수하고 이라크의 주권이 회복된 후에 민간지원단을 보낼 일이다. 백보를 양보하여 주권국 이라크의 파병 요청이 있다 하더라도, 보다 명확한 유엔결의에 근거를 둔 평화유지군 형식으로 보낼 일이지 침략국이자 점령국인 미국의 이해관계에 좌우될 사안은 아니다. 그렇지 않고 단순히 한미동맹관계나 근거없는 국익론, 혹은 사안과 직접 관계도 없는 유엔결의를 빌미로 파병을 강행할 경우 침략전쟁에 동참한다는 국내외의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하물며 점령군의 포로 학대 등으로 그나마의 명분마저 사라진 상황이 아닌가? 역대 대통령들이 망명하고 살해되고 감옥에 가는 것을 보아온 우리 국민들이, 향후 또 한 명의 대통령이 국제전범재판소에 서는 꼴을 보아서야 되겠는가?
이 와중에 돌연 주한미군의 이라크 차출 통보로 새삼 안보 논쟁이 뜨겁다. 이것은 파병 찬성론자들이 주장하는 한미혈맹론의 허구성을 여실히 보여주었지만, 이 시점이야말로 이라크 파병결정을 단호히 철회하고 헌법이 명하는 국제평화주의를 굳건히 하여 평화애호국으로 거듭 남은 물론 한반도의 평화 구축을 위한 중요한 기틀을 마련할 기회가 아닌가 싶다. 침략전쟁에 대하여 평화를 주장하는 것은 언제 어떤 상황하에서도 올바른 일이기 때문이다. 파병 문제에 대하여 우리가 이니셔티브를 쥘 수 있고, 파병 결정을 철회하더라도 미국이 단 한마디도 할 수 없는 까닭도 여기 있다.
그런데, 주한미군의 차출 통보를 접하면서,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했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국가보안법에 의하여 처벌받은 숱한 사람들이 갑자기 떠오르는 것은 너무 지나친 생각일까?
◎김종서 님은 배재대학교 법학부 교수입니다.
- 2580호
- 김종서
- 2004-0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