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친 하루를 잊고 쌔근쌔근 잠자는 아이를 등뒤로 나는 조용히 컴퓨터를 켠다. 오늘 하루 우리 세 식구가 얼마를 지출했는지 가계부를 작성하기 위해서다. 알뜰살뜰 살아서 1만 원도 안 쓴 날엔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흘러나오지만, '아끼고 아끼다가 한번 지출하면 왜 꼭 목돈으로 나가는지' 뭉텅뭉텅 줄어드는 잔액을 보면 나오는 한숨을 들이키기 바쁘다.
아내의 출산을 계기로 내가 가계부를 작성한 지 벌써 반년이 지났지만, 내 기억으로 흑자를 기록한 달은 한두 번 뿐이다. 알뜰살뜰 산다고 살았는데, 지내다 보면 항상 예상치를 초과하고 만다. 이 달은 의료비가 많이 들었고, 저 달은 경조사비가 많이 들었고, 이유는 각양각색이지만 하나같이 필요한 지출임엔 틀림없다. 비록 우리 집 가계부는 대부분 적자를 기록하고 있지만, 난 이것만큼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 나의 인간다운 삶을 포기할 수는 없으므로"
그나마 나처럼 '적자 가계부'를 기록할 수조차 없는 140여만 명의 최저생계비 수급권자들은 차라리 '인간다운 삶을 포기한 채' 살아가고 있다. 최저생계비도 받지 못하는 250여만 명의 빈곤층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1급 장애인인 이승연 씨는 2002년 최저생계비가 행복추구권을 침해한다며 헌법소원을 청구했다. 그녀는 노령의 아버지와 역시 1급 장애인인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최저생계비, 장애수당 등을 포함해 국가로부터 70만 원정도 받고 있다. 내가 살아가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비용 70만 원으로, 일을 할 수 없는 데다가 장애인으로서 한달 평균 15만 8천 원의 추가비용이 발생하는 등 늘 재활치료를 받아야 하는 이들이 도대체 어떻게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28일 헌법재판소는 "국가가 실현해야 할 객관적 내용의 최소한도의 보장에도 이르지 못하였다거나 헌법상 용인될 수 있는 재량의 범위를 명백히 일탈하였다고 보기 어렵다"며 기각 결정을 내렸다. 자구 노력이 극도로 힘든 이들에게 국가가 한 달에 70만원 정도만 지급해도 상관없다는 뜻이다. 빚이 3천만 원이나 되고 집세도 18개월이나 밀린 이들에게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그야말로 '목숨이라도 유지하려거든 죽을 때까지 빚을 지면서라도 살아라'는 이야기밖에 되지 않는다.
'가난 구제는 나라님도 못한다'는 옛말이 있다. 하지만 국민소득이 1만 달러를 훌쩍 넘어 2만 달러를 바라보는 오늘날, 이 말은 문자그대로 '옛말'에 지나지 않는다. 국가가 나서서 상위 20% 소득이 하위 20% 소득의 7배가 넘는 소득불평등 구조를 개선해 3인 장애인 가구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하는 것이야말로 '국가가 실현해야 할 객관적 내용의 최소한도'다.
컴퓨터를 끄고 아이와 함께 잠을 청한다. 그리고 지친 하루를 잊으며 나는 되뇐다. "가난 구제, 나라님이 아니면 주권자인 국민들이 직접 나서야지!"
◎ 범용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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