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6일 새벽, 일본 가나가와현 사가미하라시의 한 장애인시설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26세의 ‘인사를 잘 하던 밝은 청년’ 우에마쓰 사토시는 시설에 침입해 직원들을 결박하고, 신속하게 장애인만을 골라 살상을 가했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그가 과거 3년 넘게 이 시설에서 일하다가 해고되었다는 점이다. 그는 평소에 “중증장애인은 살아 있어도 쓸모가 없다”라거나 “장애인을 안락사시키거나 살처분해야 한다”는 발언을 서슴없이 해 시설에서 문제를 일으켰고, 이 때문에 해고가 되었던 것이다. 이어 올해 2월 일본 중의원 의장에게 “제 목표는 중증 장애인이 가정과 사회에서의 생활이 극히 불가능한 경우, 보호자의 동의를 얻어 안락사가 가능한 세계입니다.”라고 적힌, 범행계획을 구체적으로 담은 편지를 전달하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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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마쓰의 대량 살상, 그리고 70대 아버지의 아들 살인
지난 2015년 4월, 서울 중랑구에서 70대 아버지가 지적장애가 있는 40대 아들을 둔기로 때리고 목을 졸라 살해하는 사건이 있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살해한 후 ‘아들을 데리고 가겠다’라는 유서와 함께 다량의 수면제를 복용해 자살을 기도했다. 아버지는 평소 고혈압과 관절염, 척추디스크 등 지병을 갖고 있었고 자신의 신병을 비관해 왔지만, 자기가 먼저 죽으면 지적장애 1급 아들과 아내에게 큰 부담이 되리라 판단하고, 아들을 죽이고 자신도 함께 죽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해 8월, 법원으로부터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일본에서 벌어진 끔찍한 학살에 대해 생각하다가 이 장애인 가족의 비극이 불현듯 떠올랐다. 이 70대 아버지도 결국 살인을 저질렀기에 우에마쓰와 다를 바 없다는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법원이 집행유예로 선처를 하면서 밝혔던 것처럼, 고령과 지병에도 불구하고 피고인은 지적장애를 가진 아들을 수십 년 간 어렵게 보살폈고, 범행 직후 피고도 함께 죽으려 했던 점을 고려하면 그런 비교 자체가 가당치 않은 것이다.
그런데 우에마쓰의 범행과는 달리, 70대 아버지의 저 선택은 이제 우리 사회에 낯설지 않은 풍경이 된 지 오래다. 사실 이런 현실은 일본이라고 해서 그리 다르지 않다. 돌봄과 간병이 필요한 가족을 자식 또는 부모가 살해하는 이른바 ‘간병 살인’ 문제는 초고령화 사회를 달리는 일본에선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일본의 공영방송 NHK가 조사해 보도한 바에 따르면, 2010년 이후 6년간 일어난 ‘간병 살인’은 미수를 포함해 총 138건이었다. 약 2주일에 1건 꼴로 간병 살인이 발생한 셈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런 사건들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태도는 어떠했는지 잠시 따져볼 필요가 있다. 한편으론 가족을 죽인 이를 향해 ‘패륜아’ 운운하면서 ‘반인륜 범죄’라고 비난을 했고, 또 때로는 ‘동반자살’이란 이름을 들고 와서는 가해자의 처지를 격하게 동정하면서 ‘오죽했으면 저렇게까지 했을까’라고도 한다. 가해자를 향해 혀를 끌끌 차며 손가락질을 하든, 그에게 감정이입해서 위로를 전하든 사실 달라지는 것은 별로 없다. 우리 사회는 간병과 돌봄의 책임을 항상 가족에게 떠안긴 채 항상 제3자 행세를 했으며, 강 건너 불구경 하듯 그들의 고통을 관전했을 따름이다. 그래서 아무리 법과 도덕의 이름으로 그들의 행위를 단죄하고 또 때로는 위로를 한들 하루하루 쌓여가는 그들의 절망을 지워내는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위선적인 태도와 비교해보면, 우에마쓰의 선택은 오히려 더 적극적이고 솔직한 것이었다. 그는 어떠한 도덕과 감정도 배제한 채, “장애인은 차라리 죽는 편이 가족에게 편하다”라고 말했고, 그 생각대로 실천했다. 그에게는 그것이 장애인 가족과 일본이라는 국가의 편익, 그리고 행복을 위해 가장 적절한 선택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가족에겐 미안하지만 후회하진 않는다”라고도 했다. 결과적으로는 엄청난 착각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그는 일종의 ‘정의감’을 가지고 이런 행동을 했던 것이다.
장애인은 살 가치가 없다는 우에마쓰의 이 거짓 정의감을 향해, 우리 사회는 ‘네 생각은 틀렸어’라고 단호하게 말했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 돌아가는 방향은 전혀 반대다. 일본뿐 아니라 한국 언론들까지도 이 사건을 경쟁적으로 보도하고 있지만, 정작 범인이 호송차량에서 카메라에 얼굴을 들이대고 활짝 웃는 얼굴 등을 부각시키면서, 그를 한낱 ‘미친놈’으로 낙인찍고 있다. 게다가 그가 예전에 마약을 했다느니 정신이 이상해서 강제로 정신병원에 입원된 전력이 있다느니 하는 엉뚱한 얘기들만 늘어놓고, 정작 그의 생각이 어디가 어떻게 잘못됐는지에 대해선 일절 언급하지 않고 있다.
장애인 차별 사회가 내뱉는 말, “장애인은 살아 있어도 쓸모가 없다”
아마도 많은 언론들은 우에마쓰의 머릿속 생각 그 자체에 맞서기가 두려웠을 것이다. 그건 우에마쓰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 일본 주류 사회의 보편적 인식 속에 녹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시하라 신타로 전 도쿄도지사는 1999년 한 장애인시설에 방문해 “저런 사람(입소자)이란 인격이 있는 겁니까?”라고 한 발언으로 구설에 올랐다. 그러나 이 발언에도 불구하고 그는 2012년까지 도지사직을 유지했다.
일본 와코대 명예교수이자 다운증후군을 가진 40살의 딸과 함께 살고 있는 사이슈 사토루 는 지난 7월 30일 도쿄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번의 사건은 엽기적인 범행이 아니다. 우에마쓰는 ‘제 정신’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입에는 담지 않더라도 내심 그에 공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라고 이번 사건을 정확히 진단했다. 즉, 출산을 포함해 생산능력 없는 자는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없다고 하는 풍조, 그리고 그런 사람은 ‘국가의 적’ 또는 ‘사회의 적’이어서 존재가치가 없다고 보는 인식은 우에마쓰만의 것이 아니란 지적이다. 게다가 일본 사회에서는 장애인과 고령자에게 안락사를 허용하자는 논의도 뜨겁다.
일본에서 벌어진 이 끔찍한 살상 사건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고민할 것인가? 마치 재난영화를 관람하듯이 이 살상의 스펙터클에만 눈길을 보낸다면, 지금까지 우리 사회가 장애인 가족을 고립 속에 몰아넣고 사회적 돌봄과 부양의 책임을 그들의 어깨에 짊어지게 해 온 과오를 볼 수 없게 된다. 우리는 이 살상 피의자를 가장 적절하고 의미 있는 방식으로 처벌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것은 피의자를 ‘미친놈’으로 낙인찍어 그의 생각이 우리 사회와는 무관했던 것처럼 행세하는 것과는 무관하다. 우리는 “장애인은 살처분해야 한다”라고 당당하게 말했던 우에마쓰의 이 ‘멀쩡한 정신’과 이를 조장했던 우리 주변에 만연한 장애인 차별과 싸워야 한다. 그것은 억울하게 죽어간 장애인들의 넋을 기리고자 하는 이들에게 맡겨진 의무이기도 하다.
덧붙임
하금철 님은 장애인인터넷언론 비마이너 편집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