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속으로 사라지는 태양이 더욱 찬란히 빛나듯이 저물어 가는 2004년의 세밑도 뜨겁게 타오르고 있다. 국회 앞에서 십 수일째 곡기를 끊고 '국가보안법 폐지'를 외치는 1천 3백여 명의 농성단의 모습은 우리 사회 민주주의의 현주소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70,80년대 민중들은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외쳤다. 그 목마름은 민중의 손으로 직접 대통령을 뽑고, 정치인을 선출하게 했다. 그러나 대통령을 비롯해 국회는 고삐풀린 망아지처럼 민중의 뜻을 번번이 배반해 왔고, 바로 그 대표적인 예가 16대 국회의 대통령 탄핵안 가결이었다. 직접민주주의라는 자리를 빼앗아 군림한 대의민주주의의 허상에 온 국민들은 다시 한번 분노했고 국민을 '관객'으로 만드는 화석화된 민주주의가 바로 대의민주주의라는 것을 아래로부터 서서히 각성하기 시작했다.
1년 내내 자식처럼 키워온 벼들을 자기 손으로 갈아엎으며 '쌀 시장 개방'을 반대하는 농민들의 식량권 요구는 국회에 부딪혀 공허한 메아리로 돌아왔다. 김선일 씨 죽음 앞에서 통곡하며 철군하라는 국민들의 울부짖음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대통령은 부시의 야만적인 침략 전쟁에 추가파병동의안까지 전격 통과시켜 우리를 전범국의 국민으로 만들었다. 더욱이 파병연장동의안은 국회가 정상화되면 가장 먼저 의사봉의 세례를 받을 판국이다. 등골이 휘도록 일을 해도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 비정규노동자와 굶주림으로 죽어 가는 가난한 사람들이 줄을 잇고 있지만 '대표자'로 뽑아 달라고 온갖 감언이설을 늘어놓던 국회의원들은 이들을 돌보기는커녕, 정쟁을 하느라 의회일정마저 낭비하고 있다.
국민의 기본권을 지키는 문지기인 헌법재판소의 망동도 여기에 한 몫 거들었다. 이라크파병 합헌, 국가보안법 합헌, 최저생계비 위헌 소송 기각 등 민중들의 기본권을 철저히 외면하고 가진 자들의 시녀로 전락하는 배신을 일삼았다. 87년 민주항쟁의 결과로 만들어진 '기본권의 문지기'가 주인을 물어뜯는 맹수로 돌변한 셈이다.
어찌할 것인가. 4년마다 한번 씩 돌아오는 '선거'에 목을 빼고 기다릴 순 없다. 국민의 수족 노릇을 하겠다며 선거 기간 내내 사탕발림을 늘어놓던 정치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국민 위에 군림해 왔다. '묻지마' 정치로 국민들의 참여를 봉쇄하고, 국회의원이 임기 중 잘못을 저질러도 온갖 면책특권으로 울타리를 치고 있는 이 구조로는 대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대의적 '특권'만을 강화하는 것이다.
언제라도 국민을 배신할 준비가 되어 있는 국회에 민중들의 생존권을, 노동권을 맡길 수 없다. '개혁'을 정당의 홍보수단으로 삼는 세력은 결코 개혁을 이루어 낼 수 없다. 국회만 쳐다보며 기다리는 '국회바라
기'를 거부하며 이제는 국민이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해 가야 한다. 대의민주주의가 보장하는 것은 선거 때만 해방되는 노예주권일 뿐이다. 국민이 직접 정책에 의사를 반영시키고, 정치인의 잘잘못을 따질 수 있는 '직접민주주의'의 싹을 틔워야 한다.
국회가, 정부가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없다는 '절망'을 확인한 우리는, 또다른 민주주의의 희망이 전국 각지에서 돋아나고 있음을 목도했다. 2004년 부안 주민들의 승리로 끝난 핵폐기장 반대 투쟁은 우리에게 직접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시사했다. 지난해 7월 말부터 시작된 촛불 집회는 급기야 2월 자체주민투표를 실시하게 했다. 72.04%의 투표율에 91.83%의 압도적인 반대를 이끌어낸 주민투표는 국가주도의 선거가 60%에 밑도는 참여율과 매우 대조적이다. 이에 더해 부안주민들은 군수 소환운동을 진행 중이기도 하다. 결국 이러한 투쟁은 '핵폐기장 백지화'라는 성과 뿐 아니라 민주주의의 진정한 의미를 전국 방방곡곡에 심기도 했다. 현재 전국 각지의 농민들은 자체적으로 쌀개방 찬반투표를 실시해 '직접민주주의'의 쟁기질을 시작했다.
12월에 있었던 전범민중재판 또한 풀뿌리 민주주의의 전형을 보여줬다. 이라크 파병반대 운동은 평화를 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의 자생력 속에서 꺼지지 않는 촛불처럼 번져갔다. 전국 풀뿌리 조직의 참여로 만들어진 전범민중재판은 '평화를 행동'으로 만들어가는 3천4백여 명의 기소인들로 이루어져 '부시'와 '블레어', '노무현'을 전범으로 심판하는 '민중법정'을 성공리에 끝마쳤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평화'를 화두로 시작된 항해는 정박을 꿈꾸지 않는다. 평화를 향해, 그리고 민주주의를 향해 아직도 가야할 길이 멀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현재 진행형'이다. 실종된 민주주의를 찾고, 그 가능성을 열어젖히는 것은 이제 우리의 손에 달려 있다. 2005년 민주주의를 향한 우리의 항해는 비바람과 눈보라 속에서도 계속될 것이다.
- 2726호
- 2004-1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