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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대안: 개혁인가? 혁명인가?

<기고> 5회 세계사회포럼 현장(4)

지난달 28일 세계사회포럼에서 열린 '풀뿌리 대안운동에서 거시적 대안으로'라는 제목의 워크샵에서 주최측은 "저명한 사회학자이자 반세계화 활동가인 월든 벨로가 필리핀 공산당에 의해 '반혁명분자'로 낙인찍히고 위협받고 있다"고 주장하며 벨로에 대한 '구명' 서명운동에 동참해줄 것을 호소했다. 벨로에 대한 필리핀 공산당의 이러한 비난은 세계화를 둘러싼 소위 '혁명주의자'들과 '개혁주의자'들 사이의 첨예한 입장 차이를 다시 한 번 드러내며 해묵은 감정을 더 강화시킬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둘 사이의 화해를 시도하거나, 새로운 논의가 태동될 수 있는 여지를 극히 희박하게 하는 부정적인 영향도 끼칠 것으로 보인다.


월든 벨로의 미묘한 변화

월든 벨로가 이처럼 '반혁명분자'로 낙인찍히게 된 것은 최근 세계화의 대안에 대한 논의에서 그가 보인 미묘한 변화 탓으로 보인다. 단적으로 그가 참여한 '세계화에 대한 국제포럼'(International Forum on Globalization)(아래 IFG)에서 낸 세계화 대안 연구제안서의 제목이 '또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Another World is possible)가 아니라 '더 나은 세상은 가능하다'(The better World is possible)인 것은 상징적이다. 이날 워크숍에서 발표된 내용은 이 연구제안서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벨로는 이날 워크숍의 사회를 맡았다.

IFG의 제안은 사실 그리 새롭다고 보기는 힘들다. 다만 이들은 그 동안의 반전운동과 반세계화운동의 공통분모를 찾아내어 그것을 새로운 대안적 경제 질서의 원칙으로 이끌어내는 종합을 시도했다. 또한 이들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틈새에서 비시장적 원리와 연대의 원칙에 입각하여 운영되고 있는 대안 경제 운동(Solidarity Economy movements)들에 주목했다. "새로이 재편되어야 하는 거시적인 국제 경제 질서는 풀뿌리 단계에서 이미 실천되고 있는 이 비시장적 연대 경제를 뒷받침해주는 것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시각이다.

IFG는 이런 인식에 기초해 △민주주의 △상호보조성 △생태적 지속가능성 △인권 △직업과 생계 수단 등 세계화의 대안이 가져야 할 10가지 원칙과 함께 "무역에서 제외되거나 제한되어야 하는 것"의 목록과 방향을 제시했다. 먼저 공공서비스를 포함한 공공재 사용에 대한 의사결정권한은 지역이나 국가에 귀속되어야한다. WTO나 다른 여타의 무역협약이 이 부분에 대한 권리를 가져서는 안된다는 것. 다음으로 물과 공기, 종자와 인간 유전자 등은 절대 사유화되거나 독점되어서는 안된다. 마지막으로 각국은 자신들이 수입하거나 수출해서는 안되는 것에 대한 목록을 정할 권리를 가져야 하며, 핵무기나 지뢰 등과 같이 인류 전체에 해악을 끼치는 것에 한해서만 국제협약으로 수출입을 금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다.

IFG는 국제적 거시 경제의 제도적 장치로 기존의 국제통화기금(IMF)이나 세계무역기구(WTO), 세계은행(IBRD)이 아닌 새로운 기구를 창설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이 부분은 기존 기구의 개선을 주장하는 개혁주의자들의 주장과는 어긋나는 부분이다. 다만 이들은 이 새로운 기구가 '개혁된 유엔'의 통제아래 있어야 한다고 못박았다. 이 부분은 유엔 자체를 백안시하는 혁명주의자들의 주장과 상치하는 부분이다. 이들이 '개혁된 유엔'의 역할을 강조하는 이유는 "경제는 정치적 통제를 받아야만 민주적일 수 있다"는 인식에서 기인한다. 또한 WTO가 유엔과는 독자적인 기구로 존재함으로써 국가와 시민사회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에 대한 지적이기도 하다. 시장에 필요한 것은 통제라는 것.

바로 이 부분에 대한 주장 때문에 벨로는 개혁주의자로 몰린 것으로 보인다. 이는 WTO에 맞서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WTO 각료급 회담이 최종의사결정 기구로 남아있게 해야 한다는 주장과도 연관되어 있다.

전날 열린 WTO 반대 국제네트워크 '우리 세상은 상품이 아니다'(our world is not for sale network)가 주최한 같은 제목의 워크숍에서 벨로는 "이번 각료회의와 관련해 WTO를 밀어붙이기 위한 전략에서 몇가지 근본적인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고 우려한 바 있다. 지금까지 WTO의 모든 의사결정권한은 이 각료회의에 있었는데, 의사결정권한을 제네바의 일반이사회(General Council)로 옮길 움직임이 미국과 유럽연합 중심으로 보인다는 것. 계속되는 협상의 반복과 실패에 지친 나머지 '민주주의 비효율성'을 극복하기 위해, 비전문가이고 국가이기주의에 사로잡힌 집단인 각료들에게 의사결정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무역에 대한 전문가들로 구성된 일반이사회로 그 권한을 옮기려는 전략이다. 이는 미디어의 눈을 피함으로써 협상과정이 언론에 감시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으며, 시애틀에서부터 칸쿤에 이른 대규모 반세계화 시위도 피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월든 벨로는 이를 "미국과 유럽연합의 이익을 중심으로 협상을 타결 지으려는 속셈"이라고 진단하며 이 각료회의를 무산시키기 위해서라도 역설적으로 각료회의의 권한이 일반이사회로 넘어가지 않도록 막아야 한다는 것. 그러나 이것은 WTO의 즉각적인 해체를 주장하는 혁명주의자들의 심기를 건드린 것으로 보인다.


미시적 대안실천은 대안적 거시구조의 희망

게다가 생태공동체운동이라든가 몬드라곤과 같은 생산공동체운동, 그리고 생활협동조합, 소비자공동체 운동 등 '연대경제'(solidarity economy)에 대해 벨로가 보인 관심은 "구조에 대한 전면적인 혁명을 통해서만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으며 미시적인 수준에서의 실천에 그리 큰 무게를 싣지 않는 전통을 가진 혁명주의자들에게 더 큰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IFG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시장의 지구적 독재가 완전히 완성된 것은 아니"라며 "시장경제가 강력한 헤게모니를 휘두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인류가 그 안에 완전히 포위된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이미 지구 곳곳에서 비시장적 원리에 따라 움직이는 수많은 운동들이 있고 인류의 상당수가 거기에 연루되어 있어 사실상 우리는 이미 '다원적 경제 상황'에서 살고 있다는 것. 이들은 "시장에 의한 단일한 지배라는 이데올로기는 존재하지 않는 환상이자 착각"이라며 "생각보다 단일하지 않고 빈 구멍이 많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안에서 이미 실천되고 있는 비시장적 대안이야말로 희망의 근거"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시적 대안실천은 그 자체로 거시적 국제 경제 질서의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주장 또한 존재한다. 신자유주의의 빈구멍에 자리잡고 있는 이 대안적 실천들은 풀뿌리 단계에서 이루어지는 미시적 영역에서의 대안이며, 아직 거시적 구조의 대안으로 성장한 것은 아니라는 것. 미시 수준에서의 대안적 실천을 거시 수준에서의 대안적 구조로 이해하는 것은 '용기를 주는 것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구조를 보지 못하는 한 큰 오류를 범한 것이라는 것.

브라질의 해방신학자 정승모 교수 역시 이것을 "미시적인 것에 거시적인 것이 있고, 거시적인 것에 미시적인 것이 있지만, 미시적인 것이 거시적인 것은 아니다"고 말하며 최근 미시적인 대안적 실천을 거시적인 대안적 구조로 치환하는 몇몇 입장들에 우려를 나타냈다. 마치 대안학교가 공교육의 대체가 될 수 없다는 것과 같은 이치. 한마디로 시장을 뒤엎지 않는 한, 권력을 바꾸지 않는 한, 시장 안에서의 비시장적 실천은 가능하지 않으며 그 의미는 제한적이다. 전통적으로 구조개혁에 초점을 두는 필리핀 공산당의 입장에서는 벨로의 이러한 관심이 의심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IFG 역시 "미시적인 것과 거시적인 것을 섞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표시했다. 거시적인 대안적 구조는 미시적인 대안 실천에서 출발해야 하지만, 어디까지나 '제도적 대안'을 제시해야만 한다는 것. 물론 이 "거시적인 제도적/구조적 대안은 미시적인 대안적 실천을 보장하고 확장하는 것이어야 하며 현재의 거시적 국제 경제는 바로 이 미시적인 대안적 실천을 파괴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고 이들은 주장한다. 즉 대안적 거시경제구조는 대안적 미시경제실천을 위한 것이어야 하며 바로 여기에 거시적 대안을 내놓으려는 사람들이 연대경제와 같은 대안적 경제실천에 주목해야하는 이유가 있다. "미시적인 대안적 실천의 원리와 방향, 그리고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거시적 대안이란 절대 기획될 수 없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

또한 IFG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넘어서기 위해서 미국과 시장 독재를 저지해야 한다는 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전제했다. 지구적 수준에서의 대안적 거버넌스(Global Governance)를 설계하는데 가장 큰 장애물이 바로 미국과 초국적 자본과 그 집행기구들이다. 이들은 "희망적인 것은 미국의 패권주의에 반대하는 반전평화운동과 시장의 독점적 지배에 반대하는 반세계화운동이 최근 서로 협력하고 있다는 사실"이라며, "두 운동이 더욱더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점들에서 IFG가 보인 태도는 훨씬 조심스러운 것이었고, 전통적인 혁명주의자들과 원칙적으로는 많은 부분을 공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략상 보다 치밀하고 현실적이며, 유연할 것에 대한 제안이 보수적인 혁명주의자들에 의해 반혁명적인 것으로 낙인찍히게 된 것이다. 월든 벨로에 대한 이번 필리핀 공산당의 '조치'는 전통적 좌파 세력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한계를 보여주는 것임과 동시에 세계화에 대한 대안 논의에 단기적으로는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심정적 연민과 동의'에서 침묵하고 있던 세력들이 보다 활발하게 논의를 시작함으로써 대안에 대한 새로운 논쟁이 벌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포르투 알레그레=엄기호]
덧붙임

엄기호 님은 팍스로마나(Pax Romana) 동북아시아 담당(우리신학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