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도라곤 1년 배운 게 고작이면서 또 이렇게 글을 시작하니 뻘쭘하네요. 그래도 꺼내놓은 이야기가 있어서인지 마침 또 생각이 났어요. 언젠가 쓴 적 있듯이 유도의 철학은 ‘유능제강’입니다.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이긴다는. 유도의 기술은 상대를 기울여서 상대의 무게중심을 흔들고 순간적으로 내 몸을 지렛대 삼아 메치는 것이지요. 자기 몸의 무게중심을 잘 잡아야 해요. 상대를 메치려고 내가 힘을 쓰다가 그 힘에 내가 메치기를 당할 수도 있거든요.
작년에 이런 얘기를 소식지에 쓴 적이 있지요. ”우리의 운동은, 파괴를 위한 힘을 키우기보다는 이 구조의 불안정함을 노려 우리의 무게중심으로 세상을 세우는 일이 아닐까 싶어요. 불안정함은 우연한 계기들을 통해 우리에게 기회를 줄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무게중심을 잡는 법을 익히고 기술을 준비해야 할 것 같아요. 그 ‘기술’은 현재의 구조를 무너뜨릴 지점을 흔들 수 있는 것이어야 할 테고 ‘무게중심’은 스스로 대안적인 구조를 예비하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게 어설픈 유도로 그려보는 운동의 상입니다.”
한 달을 넘기고도 사그라들지 않는 촛불의 흐름을 두고 뭐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예요. 하루하루 다른 생각들, 고민들로 저도 혼란스러워요. 인터넷의 세계에 익숙하지도 않을뿐더러 백 명의 사람들이 백 가지 이야기를 하는 분위기에서 무언가를 판단하고 예측하기가 쉽지 않더군요. 하지만 혼란의 원인은 내가 ‘예측’하려고만 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벼리기보다는 캐스터처럼 이 행렬이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일까만을 고민했던 것은 아닐까. 이제야 뒤늦게, 캐스터가 아니라 선수가 되자는 생각을 해봅니다.
지금 우리는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평화를 해치는 온갖 것들이 도마 위에 올라와있지요. 광우병 위험이 있는 미국산 쇠고기, 어청수보다 질도 떨어지면서 비싸기만 한 물을 마셔야 할 수도 있는 상수도 민영화, 아픈 게 다시 병이 될 수도 있는 건강보험 민영화,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독점적 언론권력 등. 대부분의 의제들이 이미 오래 동안 얘기되어왔던 것이지요. 그런데 막상 싸움이 본격화된 시점에서 그 얘기들을 해왔던 이들이 무력해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 사이 토론은 자꾸 폭력이냐 비폭력이냐, 청와대로 가냐 마냐 등으로 빠져버리고 있습니다. 지금은 다시 무게중심을 잡아야 할 때인 것 같아요.
신자유주의가 우리의 삶을 점점 더 불안정하게 만들고 빈곤과 불평등을 심화시키며 자유를 가둔다는 점은 굳이 다시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 거예요. 신자유주의의 구조적 모순은 인간다운 삶의 권리를 해칠 수밖에 없었고 그 불안정성 자체가 ‘적’의 무게중심을 흔들 수 있는 가능성으로 존재하고 있었기도 하지요. 그리고 이제 그 무게중심은 흔들렸습니다. 상대의 무게중심이 흔들리는 순간에 결정적인 기술을 걸만큼의 준비가 충분히 되어있지 못했던 모습에 반성도 하게 되고 한편으로는 그런 반성 자체가 오만함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지만 일단 지금은 빨리 우리의 무게중심을 잡아야 할 때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적’에 맞설 무게중심은, 다시 ‘인권’이라고, 저는 그렇게 제안하고 싶습니다.
물론 이때의 ‘인권’은 근대인권담론 안에 확실하게 수렴되었던 시민․정치적 권리를 넘어서는 것이어야 합니다. 말 그대로 사람답게 살 권리, 즉 경제․사회․문화적 권리를 불가분의 것으로 지니는 ‘인권’이어야 하지요. 근대인권담론에서 교묘하게 배제되어왔던 사회권 영역이 신자유주의 세계화에서 정치적 쟁점이 될 가능성은 매우 높았고 현재 쟁점으로 제기되고 있는 의제들 역시 대부분 그렇습니다. 건강권과 물에 대한 권리, 각종 공공서비스에 대한 권리 등 재화와 서비스의 독점적 분배와 불평등은 시민․정치적 권리보다 직접적인 불만의 촉매제가 되었던 것이지요. 그렇다고 지금의 상황을 사회권의 영역으로만 한정해 봐서는 안 되겠지요. 집회 시위의 자유에 대한 폭발적인 요구와 언론권력에 대한 비판 등은 전통적인 자유권 영역의 문제이기도 할뿐더러 자유권과 사회권이 서로 분리될 수 없듯이 신자유주의 세계화 흐름은 인권을 총체적으로 짓밟아오고 있거든요. ‘인권’이라는 가치보다는 ‘자본’이라는 실재가 권력의 작동원리였기 때문이겠죠.
그러나 사회권의 정치가 본격화한 지금, 우리에게 현실적인 대안이 준비되어있지는 않아 보입니다. 사회권의 실현을 위해 생산과 분배를 재조직할 수 있을 정도의 힘 말입니다. (물론 이 부분은 노동운동이 얼마나 ‘생산적으로’ 함께 하느냐에 달려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낙관적이지 않아 보입니다. 한편으로는 지금의 국면이 ‘끝’이 아니라는 점도 기억해야 하겠죠.) 그래서 어쩌면 다시 우리의 무게중심은 시민․정치적 권리에 대한 요구로 현실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은 지금 사람들이 소리 높여 외치는 대한민국의 헌법 제1조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겠죠. 그러나 다만 출발이 거기여야 합니다. 저는 지금 인권운동이 두 가지 질문을 우리 스스로, 그리고 시민들에게 던지고 토론을 만들어나가고 현재의 요구들을 엮어 발전시켜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이 나온다는 ‘국민’은 누구냐. 다른 하나는, 우리는 왜 권력을 구성하는가.
두 번째 질문은 민주주의가 형식적인 것으로 수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필요합니다. 지금 터져 나오는 요구를 “왜 대통령이 국민이 시키는 대로 안 하냐”라는 말로 한정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의 요구들은 우리 모두가 사람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구체적인 방향들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건강과 생명을 위협하는 위험한 식량은 들여오지 말고 생활에 꼭 필요한 것들은 민영화하지 말고 공공의 것으로 잘 유지하라는 것이지요. 이런 요구들이 인권의 실현을 향한 외침이라는 점을 확인하고 ‘권력’이라는 것이 구성되는 이유 역시 인권의 실현 의무를 위임받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는 5년에 한 번 하는 선거를 통해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구성 이유를 성찰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데에 있다고 생각해요. 어떤 권력이든 그것이 지향해야 할 가치들은 분명히 하자는 것이지요. 저항권의 개념 역시 위임된 ‘권력’이 지향해야 할 가치를 빼놓고서는 구성될 수 없습니다. 물론 이것은 근대인권담론이 형성되던 시기의 토론으로 돌아가는 것일 수 있어요. 하지만 우리의 ‘권리’가 무엇인지를 지금 여기에서 다시 확인하고 그것을 보장하기 위한 권력형태에 대한 토론이 펼쳐져야 합니다. 그것은 적어도 근대주권론에 한정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첫 질문은 인권운동이 더욱 열심히 얘기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주노동자, 성소수자, 장애인, 청소년 등 시민적 권리를 인정받는 것조차 힘겨웠던 소수자들의 인권을 꾸준히 이야기해왔던 것이 인권운동이라면요. 그리고 지금 경계가 모호한 채로 담론화 되고 있는 ‘주권’에 소수자들이 경계 밖으로 밀려난다면 이 국면의 귀결은 국가주의의 강화로 그칠 수도 있기 때문에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자신이 영향을 받는 문제에 대해 영향을 받는 모든 이들이 결정하는 것이 민주주의(길거리 특강에서)”라면 대한민국이라는 영토 안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이 민주주의의 주체가 되어야 하겠죠.
이 질문들을 던지기 위해 개헌 시민투표를 해보면 어떨까요? 현재의 제도가 보장하는 것에 한정되지 않고 우리 스스로 투표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헌법을 다시 만드는 것. 그럼으로써 -일시적이라 할지라도- 시민자치권력을 만들어 가보면 어떨까요. 현재의 헌법 틀 안에서 주어진 방식으로는 결국 국회의원들의 손에 많은 걸 내맡기게 되거나 정책들마다 국민투표를 하거나-역시 대통령이 투표에 부치면- 외에 다른 방법이 없잖아요. 이미 헌법 제1조가 무대에 등장했는데 다시 기존의 제도적 틀 안에 우리의 목소리를 담아야 할까 싶어요. 이때의 개헌안에는 국민소환제나 국민발안제와 같은 내용도 포함될 수 있겠지만 저는 위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이 포함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어떤 ‘안’이 마련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토론을 거쳐야 하겠지만 적어도 인권운동은 위 두 가지 질문을 중요하게 고민해야 한다고요. 그리고 이런 제안의 맥락에서, 우리 스스로 재협상의 주체가 되자 거나 우리 스스로 건강보험 운영의 주체가 되자는 얘기들도 나올 수 있지 않을까요? 아, 네, 뜬구름 잡는 얘기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얻을 수 있는 것을 얻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얻어야 할 것을 얻기 위해 싸우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무게중심을 잡고 다시 싸움을 바라봅니다. 정말 우리가 메쳐야 할 것이 무엇인지, 우리의 무게중심이 어디에 있는지가 분명해진다면 우리는 더욱 부드러워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유도시합을 하다보면 상대가 힘을 주어 나를 기울이거나 기술을 걸려고 할 때 부드럽게 대처하기보다는 지지 않으려고 몸에 잔뜩 힘을 준 채 버티게 되곤 했어요. 그러면 나는 기술을 걸 수가 없지요. 내가 힘을 주고 버티는 사이에 상대가 몸을 옮겨 다른 기술을 걸어오는 것에 메쳐지거나, 운이 좋으면 오래 버텨 ‘지도’를 받게 되는 정도가 고작이에요. (‘지도’는 서로 힘으로 버티기만 하고 기술을 걸지 않는 지루한 상태가 지속될 때 다시 시합을 시작시키는 거예요.)
지금 차벽을 앞에 두고 우리가 보이는 모습이 힘겨루기는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미국산 쇠고기 수입의 제한, 어청수의 퇴진, 청와대로의 행진, 이런 것들은 다양한 기술들, 혹은 기술을 걸기 위한 기울이기 같은 것들이라고 생각해요. 청와대로의 행진 자체는 싸움 전체가 아닌 거죠. 오히려 지금 필요한 것은 우리의 무게중심을 잡고 상대가 흔들릴 때마다 다양한 기술을 구사하는 거겠죠?
물론 차벽은 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것은 우리가 청와대로 행진해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차벽이 민주주의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시위행렬이 차벽에 가로막힌다면, “민주주의는 차벽을 넘어섭니다.”라는 구호를 들고 조용히 올라가면 어떤가요? 지금처럼 몇 사람이 유리창을 깨는 등의 방식보다 더욱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할 수 있는 방식이지 않을까요? 연행을 각오해야 하겠죠. 그리고 정말 청와대로 가지는 못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결국 청와대로 행진하지는 못하더라도 우리의 싸움의 목표는 청와대로의 행진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확장과 인권의 실현이므로 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오히려 수많은 시민들과 함께하는 비폭력 저항은 우리의 싸움을 한걸음 전진시키지 않을까요? 그러나 또한 차벽을 넘어서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점에서 광장의 기획은 계속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나의 기술만 써야 한다면 차벽 앞에서 폭력이냐 비폭력이냐를 다투는 것이 중요하겠지만 우리에게는 하나의 기술이 아니라 다양한 기술이 필요하고 그것은 광장에서 만들어져야 할 것입니다.
소식지에 쓴 적 있는 글은 이렇게 끝나요. “떨어지는 건 무서운 일이예요. 낙법을 열심히 익혀도 두려움이 남겠죠? 왜냐하면 떨어지는 건 싫은 일이기도 하거든요. 하지만 떨어지는 것, 그걸 익힐 수 있다면, 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고 몸을 움직이는 걸 자유롭게 할 수 있다면, 아마 유도를 배운 게 정말 소중한 경험으로 남을 것 같아요. 부드럽게, 몸에 힘을 빼고, 그래서 강하게. 그러면 무게중심도 잘 잡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내가 두려워했던 것들을 살며시 열어보면서, 나와 세상을 더욱 투명하게 바라보면서 무게중심을 잡아볼래요. 힘이 아니라 인권으로!”
지금 다시 나는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느껴요. 이렇게 어마어마한 흐름 앞에서, 한 사람의 목소리, 한 집단의 목소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되묻게 되기도 하고요. 하지만 이 흐름 역시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소리가 모이며 시작된 것 아니었던가요? 부드럽게, 몸에 힘을 빼고, 내가 하고 싶은 싸움에 대해서 얘기하려고요. 그리고 이런 얘기들이 모여서 더욱 많은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것들이 만들어지기를 바래요. 다양한 기술들에 대한 고민뿐만 아니라 우리가 잡아야 할 무게중심에 대해서, 그리고 수많은 기술들 중 인권운동이 하고 싶고 잘할 수 있는 기술들에 대해서. 캐스터보다는 선수가 되어서.
활동가의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