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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으로 읽는 세상

자유한국당에 권력을 더 주는 개헌?

[인권으로 읽는 세상] 길 잃은 헌법 개정, 책임은 국회에

지난 달 26일 문재인 대통령이 개헌안을 발의했다. 60일 이내 국회의 의결을 거치면 국민투표에 부칠 수 있다. 30년 만에 헌법을 바꿀 기회가 열린 듯 했으나 국회는 멈췄고 개헌도 가로막혔다.

개헌을 저지하겠다며 자유한국당은 농성 중이다. 국회 개헌특위가 의견 수렴 절차를 위해 배정받은 예산은 거의 집행되지 않았다. '국민과 함께 하는 개헌'이 무색하다. 개헌 논의를 다양하게 촉진하고 확산시켜야 할 국회가 오히려 이를 틀어막은 채 시간만 흘러가고 있다.

어떤 개헌인가 질문이 필요한 때

독재정권 하에서 개헌은 정권 연장의 수단이었다. 1987년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광장을 메운 민주화 투쟁의 연장선에서 대통령 직선제로의 9차 개헌이 이루어졌다. 이후 개헌은 정권마다 위기 전환용 카드로 등장만 요란하다 그쳤다. 임기 내내 개헌에 부정적이었던 박근혜도 2016년 10월 국정농단에 대한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개헌 카드를 꺼냈었다.

분노는 잠들지 않았고 끝내 대통령을 끌어내렸다. 탄핵과 조기 대선으로 국면이 전환되면서 불발될 것 같던 개헌 논의가 오히려 진전되기 시작했다. 지난해 1월 여야 합의로 국회 개헌특위가 구성됐고, 지난 5월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대선 후보들은 모두 개헌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촛불의 힘이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나도록 별다른 진전이 없는 상황에서 대통령의 개헌안 발의로 개헌 논의가 다시 촉발됐다. 그러나 개헌 절차를 쥐고 있는 국회가 파행을 거듭하며 30년 만에 찾아온 기회가 사라질 수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보니 합의한 만큼이라도 일단 하자거나 시간을 더 갖고 나중에 하자거나, 개헌을 할지 말지에 대한 이야기만 반복하며 길을 잃고 있다. 가로막힌 지점에서 나아가기 위해 어떤 개헌인가 질문이 필요하다.

개헌안에 새겨진 촛불의 흔적들

여러 경로로 취합된 의견들을 반영해 마련했다는 대통령 개헌안에는 촛불의 흔적들이 새겨져있다. 개헌안을 살펴보며 거리에서 우리가 써온 저항의 역사를 떠올리게 된다. '생명과 안전의 권리'에서 세월호 참사가, '농업의 공익적 기능'에서 백남기 농민이, '소상공인의 보호'에서 업종 불문 '갑질'에 대한 숱한 폭로가, '일할 권리'에서 부당해고에 맞서 싸워온 노동자들이, '18세 이상 선거권 보장'에서 정치주체임을 선언했던 청소년들이 떠올랐다. 그냥 툭하고 나온 게 아니라 우리가 싸우며 새겨온 권리들인 것이다.

개헌안에서 보이는 촛불의 흔적이 반가우면서 또한 한계도 명백하다. 북한을 반국가단체로 간주하는 근거가 되는 한반도 영토 조항도 그대로고, 명시되지 않은 것이 부끄러울 정도인 사상의 자유도 보이지 않는다. 자유한국당이 '사회주의 개헌'이라며 색깔론을 펴는 반공사회의 현실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권리영역에 따라 권리주체를 국민과 사람으로 구분한 것이나, 자문위 제출안에는 포함됐던 '성평등' 조항이 빠진 것도 명백한 한계다. 더 많은 평등을 요구했지만 여전히 가로막혀 있는 우리의 권리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촛불 이후 한국사회에 남겨진 과제이기도 하다.

헌법은 한 사회를 틀 짓는다. 하지만 좋은 헌법이 곧 좋은 나라로 귀결되지 않고 헌법만으로 세상이 바뀌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헌법을 개정하는 과정은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방향타를 다시금 확인하는 기회이자 변화를 일으킬 디딤돌일 수 있다. 인권과 민주주의의 가치와 원칙을 다시금 새겨 넣는 개헌은 촛불이 연 세상을 함께 확인하는 계기점이 될 것이다.

제왕적 대통령제가 진짜 문제일까

10차 개헌은 촛불이 연 세상을 담아내는 작업이다. 그런데 자유한국당은 '제왕적 대통령제'만 문제 삼으며 촛불 이전으로 개헌 논의를 퇴색시키고 있다. 정치세력마다 첨예한 이해관계가 걸려있는 문제이기에 권력구조 개편은 늘 개헌 주장이 제기되었다가 사라지는 이유가 되었다. 지금도 권력구조 개편 논의에서 오직 관심의 대상은 어디서 얼마나 권력을 가질 것인지 뿐이다.

국가기구의 권한과 의무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는 중요한 문제다. 권리의 선언만으로 권리가 실현되지는 않는다. 기본권을 보장하고 실현하기에 유효하고 적절한 구조가 작동할 때 기본권 조항도 의미 있게 된다. 국가기구 간에 서로를 견제하고 견인하면서 민주주의를 향해 갈 수 있도록 권력구조를 개편하고 권한을 분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현재 권력구조 개편을 둘러싼 논의에서는 정작 누구를, 무엇을 위한 것인지가 빠져 있다.

자유한국당의 주장처럼 '제왕적 대통령제'가 문제라 대통령의 권한을 국회가 더 많이 가져간다고 해도 그것이 곧 더 많은 권력을 시민들에게 돌려주는 것은 아니다. 권한 분산을 명분으로 내세우나 실상은 이해관계 속에서 더 많은 권력을 자신의 것으로 가져오기 위한 눈속임일 뿐이다. 국가기구 간 권력의 재분배일 뿐 시민들이 권력의 주체가 되고 더 많은 민주주의로 확장되는 것이 아니다. 권력구조 개편이 누구를, 무엇을 위한 것이어야 하는지 더 많이 이야기하고 확인하는 게 필요하다.

촛불 개헌, 그 과정에 함께 할 권리

개헌과 맞물려 국회의 응답을 기다리는 숱한 요구들이 멈춰선 상황이다. 당장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지만 재외국민의 참정권을 제한해 위헌결정이 난 국민투표법도, 청소년의 참정권 보장의 시작이 될 선거연령 하향과 정당가입 연령제한 폐지 법안도 국회에서 논의되지 않고 있다. 헌법의 기본권 실현을 위한 구체적인 법제도를 마련하는 것이 국회의 역할이건만, 오히려 국회는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고 우리의 기본권을 발목 잡고 있는 실정이다.

길 잃은 헌법 개정의 길을 찾기 위해 더 많은 민주주의와 더 많은 평등을 요구하며 촛불 광장에서 울려 퍼졌던 목소리를 다시 기억해야 할 때다. 촛불 개헌, 그 과정에 함께 하는 것은 우리의 권리다. 지금 국회가 가로막고 있는 것은 촛불이 연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