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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병마에도 굴하지 않은 불꽃의 삶

원폭2세환우회 회장, 고 김형율 씨 장례식 열려

"매 순간순간이 고인에게는 삶의 끝자락이었습니다. … 깊게 패인, 앙상하게 드러난 광대뼈가 다시는 새살로 차오르지 않았을지라도 그는 웃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그의 웃음을 볼 수 없습니다.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던 그 다짐과 확신에 찬 말은 온데간데없고 저렇게 영정 속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압니다. 그는 생을 접었지만 그가 뿌리고 간 씨앗들은 아름드리나무가 되어 원폭2세 환우들의 삶을 이어줄 것입니다."

40kg도 채 되지 않던 깡마른 몸집, 연신 차오르던 메마른 기침소리, 그의 몸을 모두 가릴 만치 각종 서류로 가득했던 커다란 가방, 병상 위에서도 잃지 않았던 수줍은 미소와 불꽃같던 열정, 원폭2세 환우들의 인권을 위해 먼 길도 마다 않고 부지런히 내달렸던 발걸음. 김형율, 꺼질 듯 말 듯 늘 위태롭게 보였던 그가 끝내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36세.

고 김형율 씨의 영정

▲ 고 김형율 씨의 영정



사회단체, 지인들로 장례위원회 구성돼

2002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자신이 원폭2세 환우임을 세상에 알린 이래 병마와 싸우면서도 원폭2세 인권문제의 해결에 마지막 생을 불태웠던 김형율 씨. 그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는 장례식이 31일 오전 6시 30분 부산대학교병원 영안실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는 유족들과 '원폭2세환우문제해결을위한공동대책위원회'(아래 공대위) 관계자들, 한국과 일본의 원폭2세들과 가족들 등 평소 그를 아꼈던 지인들이 참석했다.

이날 장례식은 고인의 뜻을 기억하고 이어나가기 위해 가족장이 아닌 사회장 형식으로 치러졌다. 장례위원으로는 강주성 공대위 집행위원장, 정귀순 아시아평화인권연대 공동대표, 한국 원폭피해자 지원에 앞장서 왔던 일본인 이치바 준코 등 30여명이 참여했다. 비록 장례식에는 함께 하지 못했지만 각계에서도 조의금과 조화, 위로의 메시지를 전해왔다.

장례위원들이 고 김형율 씨의 관을 옮기고 있다.

▲ 장례위원들이 고 김형율 씨의 관을 옮기고 있다.



일찍부터 원폭2세환우회 지원모임을 만들어 형율 씨를 지원해 온 조석현 씨가 생전의 고인의 모습을 떠올리는 추도사를 읊자, 유족들과 지인들의 가슴은 다시 한번 무너졌다. 늘 그의 마지막을 걱정하면서도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던 그의 강인한 의지를 믿어왔던 지인들은 갑작스런 그의 죽음 앞에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형율 씨는 최근 건강 악화를 염려한 주위의 만류에도 일본 도쿄에서 '일본의 과거청산을 위한 국제연대협의회' 주최로 열린 심포지엄에 참석했다 건강이 급속히 나빠졌다. 늘 생의 끝자락을 살고 있던 형율 씨가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빈곤과 질병의 악순환' 속에 고통받는 원폭2세 환우들의 문제를 한번이라도 더 세상에 알리고 싶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유족들, 통한의 눈물 쏟아내

자신이 당한 원자폭탄 피해 때문에 두 번이나 자식을 잃은 어머니 이곡지 씨의 마음도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졌다. 어머니 이 씨는 1945년 6살 때 히로시마에서 피폭돼 지금까지 종양과 피부병 등 원폭후유증으로 고통받아 왔다. 네 번째 자식인 쌍둥이 가운데 하나는 태어난 지 1년6개월만에 폐렴으로 숨을 거뒀다. 남은 형율 씨는 갖은 병치레로 유년시절을 보냈고 폐기능이 일반인의 20~30%에 불과할 정도로 손상돼 최근까지 20여 차례나 입원하는 등 고통에 찬 삶을 버텨왔다. 그리고 그 형율 씨마저도 지난 29일 오전 9시경 피를 토하다 응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후송되던 도중 숨졌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응급조치를 취해 봤지만, 싸늘하게 식은 그의 몸을 되돌리지는 못했다.

두 형과 여동생도 통한의 눈물을 쏟아냈다. 생전에 형율 씨의 활동은 형제자매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지 못했다. 그들은 형율 씨의 활동이 원폭2세 전체에 대한 사회적 낙인과 차별을 낳을까 노심초사했다. 하지만 큰 형은 "동생의 뜻을 남아있는 사람들이 이어주기를 바란다"는 말로 동생에 대한 회한을 대신했다. 조의금 가운데 49제 비용을 제외한 나머지도 원폭2세 활동에 보태달라고 선뜻 내놨다.

영정의 뒤를 따르는 유족들

▲ 영정의 뒤를 따르는 유족들



형율 씨의 걸음걸음에 늘 함께했고 이제는 자신도 운동가가 되어버린 아버지 김봉대 씨는 형율 씨의 마지막 각혈 자국이 묻어있는 외투를 끝내 벗지 않은 채 담담하게 자리를 지켰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 아들의 활동을 지원해왔기 때문에 여한은 없다던 그도 아들의 주검이 담긴 관이 움직이자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화장 뒤 부산 영락공원 납골당에 안치돼

7시경 영안실을 떠난 운구차는 부산 영락공원 화장터로 향했다. 이후 형율 씨의 마지막 흔적은 일단 영락공원 납골당에 안치됐다. 유족들과 지인들은 고인의 뜻을 기리기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한국의 히로시마'로 불리는 경남 합천의 원폭피해자복지회관으로 고인의 유골을 옮기고 추모비라도 세울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워낙 민감한 사안이라 이 바람이 언제쯤 현실화될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고인의 뼈가 안치된 납골함

▲ 고인의 뼈가 안치된 납골함



60년 동안 외면당해온 원폭2세 문제를 온몸으로 대변해 온 형율 씨가 그렇게 가자, 남은 이들의 어깨는 더욱 무거워졌다. 형율 씨는 2003년 공대위 결성과 국가인권위원회 진정을 거쳐 지난해 국가인권위원회 차원의 원폭피해자 건강실태조사를 이끌어내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왔다. 그의 부지런한 발걸음은 출발 당시 단 2명에 불과했던 원폭2세환우회를 67명으로까지 불어나게 만들었고, 최근에는 민주노동당 조승수 의원실과 함께 준비해온 '원자폭탄 피해자 진상규명 및 지원 등을 위한 특별법안'이 6월 임시국회 발의를 앞두고 있기도 했다. 그의 노고가 마지막을 더욱 재촉했던 셈이다.


"환우회 재정비, 특별법 발의 등 고인의 뜻 이어나갈 터"

공대위 강주성 집행위원장은 "추모사업은 물론 유골의 합천 이장이나 원폭2세환우회 재정비, 실태조사, 특별법안 입법발의 등 남겨진 과제가 많은 만큼 고인이 미처 다하지 못한 일을 이어나가는 데 힘을 모으자"고 말했다. 공대위는 이후 고인의 유고집 발간에도 힘을 쏟을 계획이다.

심진태 원폭피해자협회 합천지부장도 "원폭2세환우회를 책임지고 이끌어나갈 사람이 없는 상태에서 형율이가 그렇게 가버려서 너무나 안타깝고 막막하다"면서도 "올해 원폭투하 60주년을 기념해 올 6월 국회에서 특별법이 꼭 통과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힘주어 말했다.

일본인 원폭2세 피해자 나카시마 씨가 고인을 애도했다.

▲ 일본인 원폭2세 피해자 나카시마 씨가 고인을 애도했다.



일본인 원폭2세로서 장례식 참석차 먼 길을 달려온 나카시마 씨도 "며칠 전 일본에서 형율 씨를 만나 그의 활동에서 큰 힘을 얻었는데 이렇게 일찍 가실 줄 몰랐다"며 고인을 애도한 뒤, "일본의 원폭2세들도 이상증세를 나타내고 있는데 일본과 미국 정부는 이를 외면하고 있다. 오는 8월 6일 '히로시마 대행동의 날'을 통해 형율씨의 삶과 원폭2세 인권문제를 적극 알려나가겠다"고 다짐했다. 일본의 반전평화운동 세력들은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된 8월 6일을 기념해 매해 이 날 히로시마에 모여 반핵평화의 의지를 모아내고 있다.

고인의 유골은 부산 영락공원 2동 31실 64723호에 모셔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