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사였던 파벨은 종교적인 신념에 따라 토요일 근무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폐철처리장으로 끌려왔다. 여죄수 이트카는 체코 공화국을 탈주하려다 붙잡혀 노역장인 이곳 폐철처리장에서 일하고 있다. 파벨은 손에 쥔 작은 손거울에 태양빛을 모아 이트카의 얼굴에 반사시키며 그녀를 유혹한다. 간수 몰래 그녀를 만날 때마다 초콜릿을 선물하면서 “원하는 거 없어요?”라고 묻는다. 감미로운 웃음만 짓고 돌아서려는 이트카에게 파벨은 청혼한다. “나와 결혼해 줄래요?”
'달리 생각하는' 이야기
영화 <줄 위의 종달새 (Larks On A String, Skrivanci Na Niti), 1969> (이리 멘젤 감독)는 1968년에 만들어졌지만 검열당국의 공개금지 처분으로 20여년이 지난 1990년에 와서야 세상에 공개되었다. 영화는 사랑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체코 사회주의 체제를 냉소적으로 관찰하는 지식인들의 시선을 담고 있다. 체제와 ‘달리 생각하는’ 이리 멘젤의 이 당당한 발현을 체코 공화국은 용납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권력을 쥐고 폐철처리장을 감시하는 노조 간부는 일하는 지식인들(또는 부르주아로 불려 지는데 이들의 직업은 이발사, 요리사, 검사, 교수, 음악가이다)을 “고철더미가 새 강철로 만들어지는 것”과 같이 새사람으로 만들어져야 할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그는 쉬고 있는 이들의 틈에 수시로 끼어들어 “노동은 신성하고 명예롭다”며 열심히 노동하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이들은 “돈도 안주면서 무엇이 신성하냐”며 노조와 사회주의 체제를 ‘거짓’이라고 응수한다. 이들은 ‘목표 초과 달성’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는 노조에 대해 “속도 타령만 하면 일을 그르친다”며 생산 노동의 신기록 갱신 발표를 비웃는다. 중앙 노조 위원회 간부가 나타나자 “모두가 동등하다” 하면서 합의도 없이, 일방적인 규정을 강요하는 노조에 동의할 수 없다며 파업을 선언하다. 이들에게 노동조합 위원회는 거창한 ‘거짓’을 늘어놓는 ‘가식쟁이’들이다.
전직 교수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낯선 언어로 성찰한다. 그는 아이들을 이끌고 교육하러 나왔다는 공화국 교사에게 사회주의 체제의 모순을 역설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 당시 체코에서는 허용되지 않았던 개인적 신념이다. 개인이 공적인 자리에서 독립적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한다는 것은 범죄에 해당한다. 교수는 정부 당국에 의해 어디론가 잡혀간다.
사적 생활양식의 정치화
인물들은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과 사적으로 말하는 것을 분리한다. 한 개인은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확신을 개별적으로 자유롭게 표현하지 않는다. 그저 사회주의 체제가 만들고자 하는, 그러나 아직 실현되지 않은 ‘가상’, 그래서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는 ‘거짓’으로 보이는 ‘가상’의 이데올로기를 계속적으로 주입하고 강요한다. 결국 체제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견해나 신념을 드러내는 것을 포기하고, 금기시된 특정 문제에 대한 문제 제기를 단념한다. 그것은 삶의 생존 방식으로 깊게 침투되어 있다.
개인은 체제 안에서 자신의 ‘진실’을 숨기며 질식되어 갔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진실’을 사랑하는 연인을 유혹할 때, 결혼할 때, 가족과 친구를 만날 때 숨김없이 드러낸다. 체코인의 일상적인 대화와 삶 속에서 드러나는 사적 영역의 삶 양식은 동구변혁의 혁명적 기초로 발전했다는 ‘사적 생활양식의 정치화’(타투어)라는 분석을 앞서 감지한 듯하다. 사적인 영역에서의 ‘진짜’ 인간을 드러내고, 공/사를 넘어선 ‘진실’ 위에 놓인 인간의 삶과 가치를 바란다.
영화가 공개되기 전 체코는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자본주의의 길에 들어섰다. 세상에 공개된 영화는 관객을 향해 말한다. ‘먹고 자고 마시고 사랑을 나누는 일이 가장 고귀한 일이야’ 그러니 ‘일과 삶을 즐겨라~’. 인간에게 고귀한 일은 분명 있다. 그러나 인간의 고귀한 일을 보장하는 사회 체제가 존재할지는 의문이다. 영화를 허용한 자본주의 체코가 영화가 당부하는 고귀한 삶을 전면적으로 허용했는가. 노동의 대가로 ‘돈을 주는’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의 삶과 가치를 꽃피웠는가. 체코 사회에서 평생을 살아 온 감독이 영화에서 갈망했던 인간의 고귀한 삶이 체코 사회 안에서 실현되는 것을 보았을지 알고 싶다.
우리는 영화 속 지식인들이 사회주의 체제에 대해 비판했듯이 자본주의가 사적인 영역이든 공적인 영역이든 인간의 고귀한 삶을 보장했는지, 자유·인권·평화라는 가치를 허용했는지 살펴 물어야 한다. 과거의 해체된 사회체제 대신 지금의 사회체제가 완강하게 버티고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 견디기 힘들다면 우리는 우리를 억압하는 체제를 거부하고, 새로운 희망과 욕구를 성사시킬 방도를 찾는 행동으로 나서야 한다. 누구는 이것을 ‘혁명’이라 말하고 현실 불가능하다 하지만, 누구는 늘 이런 ‘혁명’을 꿈꾸며 산다.
설레는 '유혹'
영화 속에서 우리를 사로잡는 ‘유혹’은 이런 면에서 혁명과 유사하다. 이성애적 연애라는 한계가 아쉽기는 하지만, 사람이 사람을 유혹하고 사람에게 유혹당하는 감정을 즐기는 몸짓은 행복으로 가득하다. 그런 삶이야말로 역동적이고 매혹적이다. 자연스러운 삶의 모습이고, 삶에 대한 구체적인 동경이며 실천이다. ‘유혹’은 ‘혁명’처럼 순식간에 의미와 권력의 체계를 무너뜨릴 수 있다. 그래서 유혹은 정치적 권력의 힘보다 강하고 탁월하고, 섹스보다 자유롭고 야릇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