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인주]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에서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데, 현실에서 우리의 정치적 권리는 얼마나 보장되고 있을까? 대선을 앞두고 후보에 대한 이야기가 넘쳐나는 지금, 박탈된 정치적 권리를 찾고자 싸우는 사람들, 정치적 권리를 제약하는 각종 꼼수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이 있다. 정치 바깥에서 정치적 권리를 더 넓히기 위해 날개짓 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전한다.
누군가에게 부탁한다는 것. 그것은 내겐 특히나 힘든 일이다. 예전에는 더 심했던 터라 사람들에게 억울한 오해도 많이 샀다. 아직까지도 그 힘듦의 이유를 명확히 설명할 수는 없다. 누군가에게 부탁하는 것이 나의 무능을 뜻한다고 생각했던 걸까? 아니면 비굴하다고 생각했던 걸까? 무엇이 되었건, 전보다 나아진 지금조차 누군가에게 부탁하기 전에 홀로 끙끙거리는 것은 여전하다.
그런 부탁을 쉴 새 없이 해야 했던 때가 있었다. 길거리에서 갈 길 바쁜 이들을 붙잡고 설득하고 이게 뭐냐고 소리 지르는 사람들을 웃으며 다시 붙잡아야 했던 때. 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는 내 기억 속에 부탁과 구걸을 수 백, 수 천 번 했었던 유일한 때로 남아있다. 주민발의 서명을 받으러 맨 처음 거리에 나갔을 때 한동안 서성거리면서 사람들에게 말조차 못 붙였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잘하지도 못했던 ‘부탁’을 쉴 새 없이, 또 원 없이 했다.
학생인권조례, 내가 느꼈던 청소년으로의 ‘정치적 무능력함’
내가 경험했던 학교의 현실은 처참했다. 학생부에는 보란 듯이 몽둥이가 진열되어 있었고 교사들은 욕지거리를 입에 달고 다녔으며, 영문도 모른 채 머리채를 잡히기도, 맞기도 했었다. 인간적인 대접이란 없는 그곳은 누구든 죽음을 떠올리기엔 완벽한 공간이었다. 그때의 경험을 잊지 못한 나에게 학생인권조례란, 단순히 끼적인 문자가 아닌 현장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 각박한 현실을 알고 변화를 이뤄낼 ‘학생인권조례’라는 대안까지 알고 있었음에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남들의 서명을 구걸하고 부탁하는 것밖에 없었다. 그래도 학교의 현실과 학생의 삶을 바꾸어낼 방법을 찾았다는 기쁨은 적지 않은 것이었다. 그 기쁨은 쌀쌀맞게 지나치는 어른들의 옷자락을 한 번 더 잡게 했고, 그 매달림은 작년 12월 서울시의회 앞까지 가게 되었다.
고통받는 청소년들이 가장 원하는 변화의 바람을 그들은 어떻게 무시할 수 있을까. 의회 농성 내내 의문은 떠나지 않았다. 그토록 많은 시민의 열망을 담아 의회에 법안을 제출하였지만, 의원들은 어떻게 하면 뜯어고칠까에 몰두했다. 법안 심의가 진행될 때마다, 인권이 보장되지 않아 가장 고통받고 있는 학생들이 이것을 그토록 바라는데, 의회는 어떻게 이토록 냉담할 수 있는지, 화가 나고, 또 화가 났다. 하지만 그들에게 소리칠 수는 없었다. 그들의 태도에 한껏 분노하였지만, 정작 그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이 내겐 없었다. 차디찬 시의회 바닥에서 많은 청소년들이 농성을 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보란 듯이 청소년을 객체화하고 조롱하였다. 그런 그들의 오만함에도 그 흔하고 흔한 ‘심판’마저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그들의 차디찬 냉소에도 우리는 ‘의원님, 그래도 우리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라며 비굴해져야 했다. 끝까지 청소년인권은 냉소적인 어른들을 붙잡아야 했던 것이다.
그렇게 학생인권조례는 처음부터 끝까지 어른들의 옷자락이었다. 그것을 더욱 세게 붙들수록 청소년은 사라졌다. 꼬박꼬박 청소년들의 서명을 받았지만, 주민발의의 성사가 불투명해진 시점에선 그마저도 짐이 되어버렸다. ‘청소년도 사람’이라는 문구는 ‘우리 아이들’이란 문구로 바뀌었고 어른들이 있을만한 행사는 모조리 찾아다녔다. 청소년 당사자의 문제였음에도 청소년은 간데없고, 어른과 그들의 연민만이 남은 운동이었던 셈이다. 그때를 하나의 단어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아마 ‘무력함’일 것이다. 현실 속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해결할 방법을 알고 있었음에도 청소년이었던 나는 아무것도 할 ‘능력’이 없었다. 결정할 능력도 없었고, 의견을 제시할 능력도 없었으며 심지어 말할 능력조차 없었다. 그만큼 청소년은 지금의 사회에서 ‘정치적 능력 없는 존재’들인 것이다.
주민발의 운동은 결국 학생인권조례의 시행이라는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였다. 결과가 좋으면 과정도 좋은 추억으로 남는다고 했던가. 하지만 과정에서 쓰디쓴 현실을 맛본 나에겐, 마냥 좋았던 추억보단 운동의 방법에 대한 치열한 고민의 계기가 되었다.
청소년인권활동가로 남기 위해, 청소년의 정치적 기본권을 외치다
이것은 주민발의 운동만이 가졌던 특수한 문제는 아니다. 주민발의 운동은 이해관계를 함께하는 ‘어른’ 혹은 그것을 결정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어른’에 매달리는 것이 청소년 행동이 실현되기 위한 필수조건인 현실을 가감 없이 보여준 것이다. 당사자가 충분히 문제 해결의 주체가 될 수 있고 그래야 함에도, 끊임없이 비당사자에게 전적으로 의지해야 하는 것. 그것이 청소년의 권리 보장을 고민하고 요구하는 자들이 처한 방법적 한계인 것이다. 올해 중순, 선거가 끝나고 한 정당에서 청소년당원의 당권을 모두 박탈하고, 그들의 당내 기구인 ‘청소년위원회’를 없앤 사건이 벌어졌다. 몇몇 어른들이 모여 청소년들을 사실상 ‘제명’해버린 이 사건은 결국 해결되지 못한 채 흐지부지되었다. 이때 한 차례 해결하기 위한 움직임이 있었는데, 이들의 방법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을 제명한 어른들에게 당권 회복을 부탁하는 것이었다. 위 사례를 청소년인권운동의 한 축으로 바라볼 수 있냐 없냐를 떠나, 이러한 상황과 청소년인권운동 역시 다르지 않음을 말하고 싶다.
이는 모든 사회 결정과정에 청소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벌어지는 문제이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라 꺼내기 민망하지만, 많은 사회의 결정들, 국가의 결정들, 공동체의 결정들은 어른들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사회의 정책, 자원 분배 등 모든 사회적 결정들이 그들에 의해 이루어지기에, 그들의 힘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제도화할 수 없다. 철저히 당사자의 세계와 현실을 공감하지 못하는 이들을 붙드는 것이 당사자의 문제를 해결할 중요한 열쇠인 현재에서 청소년운동은 어른들에게 종속되는 방법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결국, 지금까지의 비굴함, 억울함은 결정의 주체가 그 당사자가 아닌 자들, 어쩌면 청소년과 사회적으로 대립을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는 자들이기에 나타난 필연적인 결과이다. 사회 결정과정, 즉 정치 속에서 청소년이라는 존재가 생겨나기 위해서는 우선 청소년의 정치적 기본권이 보장되지 않는 현실을 바꾸어야만 한다. 청소년들도 시민의 기본적 권리인 선거권, 피선거권 등의 정치적 기본권이 보장되어야만 청소년이 당사자 주체로서 참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정치에 청소년이 존재해야만 청소년 당사자의 주체적 문제 해결이 가능해지고, 청소년인권운동의 당사자성이 더욱 명확해질 것이다.
지금까지 운동의 방향이라는 거대한, 그리고 추상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았지만, 사실 이것은 곧 나의 문제이기도 했다. 청소년의 정치적 기본권이 보장되지 않는 현실에서 청소년인권운동은 청소년이 아닌 비청소년들을 고민해야 했고 그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그들의 관점을 이해해야 했다. 이속에서 청소년인권활동가라 스스로를 생각했던 나는 나의 정체성에 대한 깊은 회의가 들 수밖에 없었다. 희미해져 가는 청소년인권운동의 당사자주의를, 그리고 운동 속에서 점점 사라져만 가는 나의 청소년이라는, 청소년인권활동가라는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청소년의 정치적 기본권은 중요하다.
청소년의 정치적 기본권이 보장된다면
물론 정치적 기본권 보장을 위한 앞으로의 운동 역시 청소년인권운동이 가진 방법적 한계를 완벽히 벗어나긴 힘들다. 아니, 어쩌면 그것을 더 적극 활용해야 할지도 모른다. 무엇을 하건 청소년의 권리 보장이 어른들의 시혜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우리가 결정할 권리를 갖기 위해선 이전보다 더 비굴해져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마지막 비참함이 될 것이다. 청소년의 정치적 기본권이 보장되고, 청소년의 정치 참여가 가능해진다면, 이전과 같이 어른들에게만 의지하는 운동이 아닌 더욱 다양하고 당사자의 목소리를 담아낼 수 있는 운동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한 번의 비참함으로 앞으로 청소년의 인권 보장에 미적지근한 의원들을 심판하자고 소리치고 끌어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청소년들의 서명과 청소년을 대변하는 정치인들을 앞세워 싸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에서 더 나아가 청소년이 직접 결정할 수도 있는 미래를 이루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청소년의 정치적 기본권 보장을 마지막으로 더는 비굴하지 말자. 청소년의 정치적 기본권만 보장된다고 당장 이루어질 것들은 아니지만, 단지 꿈꾸기만 해야 하는 지금의 현실은 너무 비참하고 비굴하지 않은가.
덧붙임
검은빛 님은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와 <청소년의 정치적 기본권 '내놔라' 운동본부>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