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주 어렸을 때 엄마, 아빠와 헤어져 어린이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 지냈지요. 그러다가 입양이 되어 새로운 엄마와 아빠를 만났어요. 남자아이가 올 줄 알았던 새 엄마와 아빠는 날 보고 다시 돌려보내려 했지만 지금은 누구보다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며 살고 있답니다. 나는 누구일까요?”
“집안 사정이 어려워져서 엄마와 떨어져 시골 외할머니댁에서 지내게 되었어요. 그래서 지금은 외할머니와 나, 이렇게 한 가족으로 살고 있지요. 처음에는 모든 게 낯설었지만 나를 위해 이것저것 신경 써주시는 할머니의 마음을 느낀 지금은 할머니랑 헤어져서 집으로 돌아갈 일이 마냥 신나고 즐겁지만은 않을 것 같아요. 나는 누구일까요?”
날개 달기 : “맞아, 얘네 가족은 그랬지~”
빨강머리 앤, 영화 <집으로>의 상우, 우당탕당 별장에 혼자 사는 말광량이 삐삐, 아기공룡 둘리처럼 텔레비전이나 동화책에서 만났던 동무들 이야기에 “맞아, 얘네 가족은 그랬지~”로 시작한다. 한편, 새삼 주위를 둘러보며 정말 많은 ‘집’들이 있음을 인식한다. 그리고 저렇게 많은 집집마다에 살고 있는 ‘누군가’를 모두 ‘아빠-엄마-아이’로 이루어진 가족의 모습으로 떠올리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냐며, 꿈틀이들에게 넌지시 묻는다. 다들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정말 왜 우리는, 실제로 우리 주위에 그토록 다양한 가족이 존재하는지 알면서도 ‘가족’ 하면 으레 ‘아빠-엄마-아이’를 떠올리며 이른바 ‘정상가족’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더불어 날갯짓 1 : 별별 가족을 만나보니…
‘우리 동네 별별 가족’은 이렇듯 우리 주위에 무지개만큼 여러 빛깔 가족이 살고 있음을 깨닫는 일과 더불어, 내 안에 있는 가족에 대한 단단한 편견의 벽을 깨는 날갯짓이다. 즉, 다양한 가족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정상-비정상의 경계로 나누지 않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특히 가족이 어린이의 삶이 이루어지는 가장 기초적인 관계망임을 생각해볼 때, 그 가족의 형태가 어떻든 그 자체로 부정되거나 비정상으로 규정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자기 가족이 외부로부터 비정상 또는 비난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날 때, 누구든 자기 자신을 긍정할 수 있고 더 나아가 가족 내부의 문제에 대해서도 솔직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신문이나 잡지에서 오린 사람 사진을 성, 나이, 장애, 인종 등이 골고루 섞이도록 주의하며 봉투에 담는다. 둘씩 짝지은 꿈틀이들에게 봉투를 건네고, 봉투 안 사람들이 우리 옆집에 사는 이웃일지도 모른다며 어떤 관계의 한 가족일까 만들어보자고 한다. 아니면 다양한 사람 사진들을 나눠준 다음, 여러 가족을 구성해보라고 하여도 흥미로울 것 같다. 이른바 ‘정상가족’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가족을 구성하는 자기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 같고, 어쩌면 어떠한 관계 속에서 살고 싶다는 꿈틀이의 욕구가 표현될 수도 있겠다 싶어서이다. 그런 다음 “이 가족은 이래서 참 좋을 것 같아!”라고 생각하는 것을 짝꿍과 이야기 나누고 적어보자 한다.
다섯 남성으로 이루어진 가족을 꾸민 꿈틀이는, 식구들 모두 공통된 관심사를 가지고 있는 상황을 만들어 다른 꿈틀이에게서 “서로 말이 잘 통해 재미있겠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또 “모두 남자라서 목욕탕 갈 때 외로운 사람 하나 없겠다”라는 이야기에 맞장구를 치기도 하였다.
한편, 장애를 가진 식구가 있는 가족을 꾸민 꿈틀이들은 “서로 돕는 마음이 더 깊어 이해하는 마음이 클 것 같아”라면서 “다른 장애인에 대해 생각하는 마음도 달라질 것 같다”는 이야기를 던진다. 이러한 꿈틀이의 말 속에서, 사회적 약자와 함께 하면서 한 뼘은 더 자랄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인권감수성을 떠올렸고, 활동 안에서 제 힘으로 ‘반짝이는 보물’ 하나 찾아 담는 꿈틀이의 모습에 힘이 솟기도 하였다.
하지만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변수들 때문에 진땀을 빼기도 하였다. 꿈틀이들이 활동에 집중할 수 없을까봐 연예인 사진은 빼고 오려 모았는데, 사진 속 사람의 표정과 외모가 별별 가족을 만드는 데에 작용할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즉, 모여 있는 사진 속 사람들의 행동이나 외모, 표정이 꿈틀이들이 자유롭게 한 가족을 꾸미는 데에 많은 제약을 주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할아버지 두 분과 젊은 여성, 남자 아이로 구성된 가족을 보고 ‘이 가족은 어떤 관계일까? 어떤 사람들일까?’ 하며 꿈틀이들이 마음껏 생각을 펼칠 수 있어야 하는데, 사진 속 인물들의 행동이나 표정이 꿈틀이들에게 영향을 주어 이들이 ‘누구 누구가 있나’를 넘어 ‘무엇무엇을 하고 있나’까지도 쥐어준 꼴이 되어 버렸다. 그러다 보니 다양한 연령과 인종, 성의 차이에 주목하기보다 사진 속 사람들의 외모와 표정에 더 주목하는 꿈틀이들이 생겨났다. 이런 예상치 못한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꿈틀이들에게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할지 무척 난감하였다.
더불어 날갯짓 2 : 꼬리에 꼬리를 물고 뭉게뭉게
그렇게 꿈틀이들이 만든 약 열다섯 집의 별별 가족을 칠판 위 동네지도에 붙여 보았다. 여성들만 사는 집, 남성들만 사는 집, 아이들이 많은 집, 할아버지들이 많은 집……. 그런데 가만, 눈길을 끄는 게 있다. 이 집도 그런가 싶더니 저 집도 그렇네, 아차 싶다. 순간 입안이 텁텁해지면서 뒷목이 움츠려진다.
이런 저런 이야기와 활동으로 어느 정도 우리 주위에 존재하는 다양한 가족에 대하여 생각해보았다고 여겼는데,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테두리가 있었으니 바로 ‘혈연’이라는 관계였다. 남성들로만 이루어진 가족은 큰아빠-작은아빠-아빠-아들의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별별 가족이었고, 여성으로만 이루어진 별별 가족은 할머니-엄마-이모-딸-딸의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다면 인종이 다른 사람이 함께인 가족은 어떻게 관계 맺었을까 궁금해, 인종이 다른 아이가 구성원으로 있는 가족을 만든 꿈틀이들에게 가족 소개를 부탁했다. 꿈틀이들은 처음엔 너무 당황했다며 혼자만 외국인인데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그냥 ‘손자’로 나타냈다고 이야기하였다. 가족 안에 인종이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낯설게 받아들이고 결국엔 같은 인종의 한국사람으로 가정해 버린 것이다. 혈연 중심의 가족관이 우리 안에 얼마나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지 다시 한 번 확인되는, 씁쓸한 순간이었다. 사실 그 씁쓸함은 꿈틀이를 향한 것이라기보다는, 혈연을 뛰어넘는, 보다 다양한 가족의 모습을 제공하지 못한 나를 향한 것이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많은 매체에서 ‘가족 = 혈연관계 = 정상’(그리고 ‘정상’하면, 남자어른과 여자어른과 아이)’을 공식화하였는지, 그 견고함에 입맛을 다시며 어떤 질문, 어떤 이야기를 던질까 고민한다.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다 ‘이렇게 작은 활동에서도 이렇게 많은 고정관념이나 편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드러나다니…’ 하는 생각이 뭉게뭉게 피어났다. 문득, 드러내고 펼친 만큼 인권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사고를 전환하도록 하는 돋움의 역할을 잘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선다. 그런데 이러한 걱정이 곧 의욕으로 바뀐다.
“ 마음을 맞대어 - ‘혈연중심의 가족’을 넘어서려면?
정말 별별 가족이 다 있구나. 이 지구에는 말이다.”
“피가 안 섞여도 그래도 정이 있고 함께 살면 가족인 걸 알았다.”
“짝과 만든 행복한 가족 : 우리 가족과 조금 다른 가족을 이상하게 생각하면 그 가족도 기분이 상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오늘 본 가족 말고 더욱 더 별난 가족도 있겠지?”
라며, 활동 안에서 제 힘으로 ‘반짝이는 보물’을 찾아 담는 꿈틀이들의 날갯짓에서 희망을 보면서도 다짐한다. 다음 번 교육에선 혈연중심의 가족을 넘어서는 가족을 상상할 수 있는 활동을 좀더 보완해 보리라고.
‘가족의 모습(형태)보다는 가족이라면 서로 가지고 나눠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중요하다’는 말.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 우리의 삶 속에서 이 말이 얼마나 살아 작용하느냐는 또 다른 문제이다. 그렇기에 ‘우리 동네 별별 가족’은 이러한 사실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다양한 가족으로부터 나아가 한 명 한 명의 개인 그 자체에 대해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단초가 되리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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