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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 좀 들어봐] 세상을 바꾸는 걸 페미니즘, 집밖으로 걸/어 나가자

걸 페미니스트의 가족 바라보기

걸 페미니즘이라고?

청소년인권과 페미니즘의 만남, 이 말이 내가 들었던 것 중에 가장 깔끔하게 ‘걸 페미니즘’을 설명한 말인 것 같다. 청소년이라는 위치와 여성이라는 위치는 여러 모로 닮은 면이 많다. 촛불집회에서 “여자, 애들은 뒤로” 소리를 들으며 ‘배제’라는 불쾌한 경험을 공유했던 것도 그렇고, ‘여리다’ ‘약하다’ 등의 이미지에 묶여 있는 탓에 툭하면 약자화 되어 성인·남성들의 보호를 강제로 받는 처지에 놓이는 것도 그렇다. 그 뿐인가. 마초 남성들이 “여자는 남자 말을 잘 따라야” 따위의 뻘소리를 하며 막무가내로 억지를 쓰는 모습은 꼰대어른들이 “애들은 얌전히 어른 말씀이나 잘 듣고…” 운운하며 권위적으로 청소년들을 대하는 것과 꼭 닮았다. 이토록 닮은꼴이니, 청소년인권과 페미니즘의 만남은 필연일지도 모른다. 청소년인권과 여성인권을 동시에 말할 때, 가장 먼저 또 자주 나오는 얘기가 가정(가족)에 대한 얘기다. 가정은 청소년·여성이 공통으로 억압 받으며 생활하는 첫째가는 영역이다. 공통분모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여기서, 여성·청소년이 가족 안에서 어떻게 얼마나 억압받으며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해 늘어놓을 생각은 없다. 그런 건 그동안 많이 해봤다. 그래서 이번엔 좀 다른 얘기를 해보려 한다. 가족을 생각할 때마다 가장 헷갈렸던 부분인데, 단순하게 말하면 ‘인권의 사각지대냐 최후의 안식처냐. 정체를 밝혀라, 가족!’ 뭐 이런 거다.

빨강물고기 자기소개 프로그램 진행 장면

▲ 빨강물고기 자기소개 프로그램 진행 장면


가정(가족)의 두 얼굴, 최후의 안식처 그리고 인권의 사각지대

언젠가 집에 있으면서, 집 밖에서와 달리 인권이고 나발이고 싹 다 잊어먹은 채 못 되게 굴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고 퍼뜩 놀랐던 적이 있다. 그 때 처음 ‘가족들한텐 왜 더 막 대하게 되지?’란 의문을 떠올리며, ‘내가 무슨 짓을 하든 다 감싸주는 가족’이라는 개념이 아름답기는커녕 아주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족인데, 뭐” 무심코 해왔던 말이 폭력과 인권침해에 관대하게 만드는 주문이었다는 사실 또한 알았다. ‘가족’이 무조건적인 이해와 용서를 요구하는 관계임을 의미하진 않는다. 가족이라도 괜찮지 않아야 하는 것은 분명 존재하지만, 가족이라서 괜찮아야 하는 건 있어선 안 된다. 그런 ‘가족 면죄부’가 가정을 또 하나의 인권의 사각지대로 만드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가족’이지 않은가. 이때의 가족은 (현실과 동떨어졌거나 말거나) 무조건 아름다운 그 무언가다. ‘힘겨운 세상살이 속에서도 그나마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건, 그래도 가족 뿐’이라는 생각. 이른바 최후의 안식처로서의 가족이다. 모든 가족은 이렇다 혹은 이래야 한다는 인식은 사람들의 환상과 기대의 산물에 불과하다. 적어도 내 생각은 그렇다. 환상이든 기대든 간에 어쨌거나 사람들은 실제로 그런 감정을 느낀다. 내가 헷갈렸던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따뜻해 보이는 가족 안에서 폭력이 난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된 후에도 여전히 ‘그래도’ 가족에 대한 끈끈한 감정을 버리지 못 하는 사람들. 많은 사람들에게 가족은 정겹고 따스한, 이 지상의 마지막 보루다. 실제가 어떻든 간에 그렇게 느낀다. 이런 사람들을 뭐 어째. 좋다는 데 어쩌라구. 하지만 지금 와 다시 생각해보면, 가족에 대해 사람들이 갖는 이러한 끈끈한 감정은 방치되어선 안될 ‘함정’이다.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가족만세’스런(?) 감정이 어떠한 결과를 만드는지 알게 된 후 내가 내린 결론이다.

감정의 함정은 거짓논리보다도 훨씬 더 교묘하고 견고하다. 가족에 대한 감상에 취하는 만큼 내가 바라보는 가족의 모습이 현실에 상관없이 미화되고, 가족의 가치에 대한 믿음이 커지는 만큼 가족이란 이유로 폭력마저도 허용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가족 면죄부가 달리 생기는 게 아니다. 전엔 감정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겠거니 했지만 이젠 생각이 다르다. 가족에 대한 끈끈한 감정이 은연중에 가족 내 폭력을 허용하는 근거로 작용한다면, 이 감정은 위험하다.

“가족 내 폭력 등 다 알지만 그래도 가족은 안식처니까 어쩌구…”하는 이유로 가족의 절대적인 가치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건대, 인권의 사각지대로서의 가정과 최후의 안식처로서의 가정은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별개의 개념이 아니다. ‘가정은 최후의 안식처’라는 환상(구라)은 가족주의를 정당화하는 이유가 될 수 없다. 이 환상(구라)은 사실상 가정에서 인권침해가 발생하는 구조의 보다 깊은 원인이다. 다들 알고 있었다고? 난 몰랐다. 그래서 이 기회에 꼬인 머릿속 정리 좀 해봤다. 정리가 나름 잘 돼서 머릿속이 조금 깔끔해졌다.

“이갈리아의 자식들” 역할극 중 한 장면; 유스 이갈리아는 여성, 청소년이 권력을 지닌 가상의 세계

▲ “이갈리아의 자식들” 역할극 중 한 장면; 유스 이갈리아는 여성, 청소년이 권력을 지닌 가상의 세계


집에서도 불편하게 살자

가정이 정말로 자신의 ‘안식처’인 사람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집이 안식처가 될 수 있냐 없냐의 여부는 가족 내 자신의 위계(권력)가 어떤가에 따라 달라진다. 한 마디로, 돈 벌어오는 아빠 등 권력이 큰 사람들한텐 가정이 휴식처일 수 있지만, 매일 엄마 잔소리에 깨지고 용돈에 협박당하는 청소년들한텐 가정은 결코 휴식의 공간이 아니다. 나는 최근 그걸 실감하고 있다. 어렸을 땐 집에 있는 게 무서웠는데, 이젠 그럭저럭 꽤 편해졌다. 나이가 성인에 근접하면서, 부모가 예전만큼 쉽게 나를 다룰 수 없게 됐으니까. 빨강물고기에서 유스 이갈리아 상황극을 하면서도 느낀 건데, 약자로 사는 게 아무리 고달프고 힘들다 할지라도 지금의 남성-성인들과 똑같은 짓을 하는 강자가 되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항상 조심한다. 내가 약자인 면만 보면서, 내가 강자인 부분은 모르는 척 하지 않으려고. 가족들이 나에게 가하는 폭력은 거부하면서, 다른 가족들에게 내가 가하는 폭력엔 관대한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도록. 집에서만이라도 편하게 지내고 싶기도 하고, 편하게 지낼 곳이 필요하기도 하다. 하지만 아무래도 가정의 구라를 받아들이면서 편하게 살지는 못하겠다. 집에서 ‘역시’ 불편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불편해진다.

[끄덕끄덕 맞장구]

가족/집을 건드리는 것은 쉽지 않은 문제이지요. 내가 남의 집 일에 간섭하는 것도, 누가 내 집 일에 간섭하는 것도 그리 유쾌하진 않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누군가 자신의 집에 대해 왈가왈부 하면 그것을 자신에 대한 모욕과 일치시키고 수치스러워하는 것 같아요.
거리두기. 언제나 문제는 거리두기입니다. 연애든 가족이든 흔히 ‘사적’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은 자신과 너무 가까워 거리두기가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이지요. 사적인 문제를 건드리는 것은 자기 자신을 건드리는 문제이기 때문에 불간섭 영역이라는 것입니다. 거리두기가 가능하다는 것은 그 공간에서의 관계와 발생하는 상황들에 대해 비판하고 분석하는 것이 가능함을 의미합니다. 대화와 토론의 주제가 될 수 있어야 관계의 조정을 통한 합리적인 판단이 가능할 텐데, 적어도 가족은 그것이 쉬운 공간은 아니지요.
사적인 영역에서 발생하는 갈등은 분쟁의 조정 과정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기존의 권력관계에 기대 도덕적으로 비난받기 일쑤입니다. 집에서 아버지에게 대들면 버릇없는 자식이고, 아내가 남편보다 주장이 강하면 ‘남편 잡아먹을 년’이 됩니다. 그래서 사적인 공간은 권력을 가진 누군가에게는 매우 편한 공간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자신의 욕망을 억눌러야 하는 억압의 공간이 되기 쉽지 않나요? 그래서 쉽게 사적인 공간이라 여겨지는 곳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눈에 보이는, 또는 잘 보이지 않는 폭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가정 폭력이라고 하면, 흔히 아내 구타나 아동 학대가 떠오르지요. 그리고 그 심각성은 사회적으로 꽤나 많이 인식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폭력이 반복되도록 만드는 권력의 차이, 가족 내 여성(아내)과 남성(남편) 또는 자식과 부모 간의 권력 그 자체에 손대는 것은 여전히 불경한 일로 여겨집니다.
집에서 끊임없는 가사노동과 감정노동에 시달리는 여성에겐 집이 사적 공간이 아니듯, ‘성인’이 될 때까지 자신의 권리를 부모에게 위탁하고 자상한 ‘보살핌’(감시와 관리)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청소년 역시 집이 사적 공간일 수 없습니다. 가족 안에서 경제적, 정치적 자립을 지원받지 못하고 온전한 개인으로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여성과 청소년의 인권 문제는 그것이 사회적 문제로 여겨질 때 해결될 수 있어요. 집밖으로 나가 거리두기를 시도할 때 관계 변화를 꿈꿀 수 있는 것이지요.
울퉁불퉁한 돌덩어리를 매끈한 옥돌로 보이게끔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가족 안에서 삐걱거리는 나의 모습은 지워야 하는 옥에 티가 아닐 거예요. 내가 즐겁지 않고 행복하지 않다면, ‘즐거운 나의 집’이 나를 어떻게 억압하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가족 안에서 상대적 약자인 여성과 청소년이 직접 자기 권리를 주장하며 움직이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지요. 반짝반짝 아름다워 보이는 ‘가족’이라는 허상을 깨는 일은 현실을 직시하게 함으로써 우리 모두를 더욱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길일 거예요. [한낱]


*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에서 기획한 청소년을 위한 인권놀이터 [빨강물고기]는 12월 13일 여성, 청소년의 시선으로 집/가족에 대해 비판적 분석을 시도하는 “세상을 바꾸는 걸 페미니즘, 집밖으로 걸/어 나가자”를 진행했습니다.
덧붙임

엠건 님은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여성주의 팀에서 활동 중인 청소녀입니다. 한낱 님은 인권교육센터 '들'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