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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네 방앗간] 즐거운 나의 집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
내 나라 내 기쁨 길이 쉴 곳도 / 꽃피고 새 우는 집 내 집뿐이리


잘 알려진 <즐거운 나의 집>의 노랫말이다. 군대의 적대감을 거두고 미국의 남북 전쟁을 화해시킨 노래라는 성스러운 배경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절마다 족족 댓글을 달고 싶다. 지친 몸과 마음에 안식을 주는 집이 그립다는데, 굳이 남의 집 이야기에 퉁 놓는 나에게 낭만 없이 비뚤어진 심보라고 흉을 볼 수도 있겠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바로 그것, ‘집’이라는 가족적 낭만에 관한 것이다.

지난 2월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KSCRC)에서는 ‘동성결혼’을 주제로 강좌를 열었다. 센터 대표인 한채윤씨는 강좌를 열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요즘은 이성애자도 사랑해서 결혼하지 않는다. 동성애자가 ‘우리 사랑하게 해주세요’라 외친다고 동성결혼이 설득될까”

내 주변의 한 활동가는 “우리 집(원가족)은 엄마는 자기가 아파도 한 평생 일하고 돌보면서 살고, 아버지는 아직 철이 없고, 딸들은 서울로 나와 공부도 했고 결혼할 생각은 안하고... 그래도 큰 굴곡은 없으니 정상가족이지.”라 진지하게 말해놓고 이내 웃음보가 터진 일이 있었다. 그래그래, 아파트 광고나 보험회사 광고에 나오는 그 가족들보다 너의 가족이 정상 가족이겠다. 사랑만으로 하는 것이 아닌 결혼, 불완전한 정상가족과 같이 <즐거운 나의 집>의 이상을 배반하는 가족들은 너무도 많다. 오히려 그 이상과 배반되는 것이 가족이라 불리는 공간의 자화상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가족’이라는 것이 의문시 되지 않고, 굳이 ‘가족’이 무엇인지 묻지 않아도 되는 때도 있었을 것이다. 혼인과 혈연으로 연결된 사람들은 가족이고 친족이기에 수십 년 만에 처음 본 사람도, 기억이 가물가물한 사람도, 온갖 증오로 점철된 관계일지라도 가족이라는 이름에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가족을 의문시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일지도 모른다. 대표적으로는 여성으로부터 시작된 의문이었을 것이다. 가족은 여성의 고유한 역할과 돌봄 및 양육의 부담을 담보로 한다는 측면에서 말이다. 퀴어(동성애자, 트랜스젠더 등)도 의문을 보탠다. 동반자 관계는 생물학적 남녀 사이에만 용인되는 것인지를. 청소년도 묻는다. 사랑과 보호라는 이름으로 폭력과 규율을 가하는 이들을 가족이라 이야기할 수 있는지를.


이러한 강력한 의문은 가족의 이상을 쫓는 이들에게 도전이 된다. 여자들이 이기적이어서 이혼율이 높아지고 미혼율이 높아진다고 본다면, 요즘 애들이 버릇이 없어서 천륜을 거스르고 부모에게 감사할 줄 모른다고 본다면, 사회가 성적으로 문란해져서 동성애나 동거가 성행한다고 본다면 여타의 현상들로부터 오늘날 가족제도의 실패를 읽어내기보다는 어떤 인간 집단(여성, 동성애자, 청소년)의 도덕성 결여로 치부하기 쉬울 것이다. 가족 해체를 우려하고 가족을 지키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가족’이 무엇인지 또 무엇이어야 하는지, 그 대답이 절실해진다.

<즐거운 나의 집>은 그와 같은 절실한 물음에 대한 대답이다. 가족만이 ‘친밀감’과 ‘사랑’이 가능한 유일한 공간이라고 믿게 만드는 것, 이미 주어진 무조건적인 관계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어떤 관계든 긴 시간 동안 노력과 이해, 돌봄과 싸움 없이 얻어지는 관계는 없다. 오늘날 가족적 낭만을 노래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면 과연 현실도 그 노래와 비슷할지는 한 번 더 생각해볼 일이다.
덧붙임

더지님은 언니네트워크(www.unninetwork.net) 활동가입니다. * 이 글은 여성주의 커뮤니티 사이트 ‘언니네’(http://www.unninet.net/)의 채널[넷]에 동시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