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속엔 수많은 경우의 수들이 있었지만 유독 집요하게 나를 지배하며 불안에 떨게 만드는 한 가지는 바로 “만에 하나 그가 조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어디선가 사고를 당해 병원으로 실려가 당장 수술이 필요한 상황이라면?”이었다. 여기서 핵심은 파트너에게 닥친 불의의 사고 보다 생사의 기로에 선 파트너의 치료가 시급한 순간 나에게는 그를 지킬 수 있는 어떠한 권리도 없다는 절망감과 무력함에서 기인하는 불안이었다. 만약, 정말 나에게 그런 상황이 닥친다면 나는 그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렇듯 혈연과 결혼, 입양으로 맺어지지 않은 소위 ‘정상가족’의 범주를 벗어난 관계 속에 있는 이들이라면 한 번쯤 이런 상상에 불안과 무기력 그리고 절망을 느껴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상상조차 하기 싫은 상황들은 상상 속이 아닌 현실 세계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런 현실을 대변해주듯 2014년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에서 발표한 한국 LGBTI 사회적 욕구조사 중 <파트너 관계나 공동생활 유지에 필요한 제도>에서 수술 동의 등 의료 과정에서 가족으로서 권리 행사가 필요하다고 한 응답자가 3,158명중 67.5%인 2,132명으로 가장 많은 응답자 수를 기록했다.
또한 수술 동의 및 의료과정에서의 권리 행사에 대한 욕구는 비단 성소수자 뿐만이 아닌 비혼 여성, 1인 가구, 경제적 필요와 삶의 지향에 의해 모인 생활 공동체 등 다양한 형태로 삶을 꾸려나가고 있는 이 시대의 많은 이들에게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사회의 다양한 변화들을 감지해내고 사회구성원들의 목소리들을 듣고 그들이 안정적인 삶을 영위 할 수 있도록 장려하고 제도들을 개선해나가야 할 의무가 있는 국가는 여전히 혈연과 결혼에 기반으로 한 ‘정상가족’의 프레임을 고집하고 있다.
물론 이렇게 가부장적이며 시대의 흐름에도 맞지 않는 좁은 의미의 가족만을 고집하는 국가 정책의 변화를 위한 시도도 있었다. 지난 19대 국회에서 발의 예정이었던 ‘생활동반자법’이 바로 그것이다. ‘생활동반자법’은 다양한 형태의 동거를 가족의 형태로 인정하고 생활동반자관계의 성립과 효력 및 등록을 규정하는 법안이다. 만약, 이 법안이 통과가 되었다면 파트너의 수술동의서에 동의는 물론이고 국민의료보험에 피부양자로 등록도 할 수 있으며 의료적 혜택 이외에도 주거와 복지 서비스 전반 등 일상 속 다양한 부분에서 서로의 관계를 법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생활동반자법’을 향해 보수개신교의 반동성애 세력들은 ‘가족과 교회의 해체’를 외치며 ‘동성애 옹호 법안’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무차별 폭격을 가했다. 결국 이 ‘생활동반자법’은 제대로 발의도 되지 못한 채 그렇게 19대 국회의 종료와 함께 끝을 맞이했다.
이렇듯 이 사회가 평등으로 향하는 길은 험난하기만 하다. 그러나 사회의 구성원들이 삶을 바라보는 시각과 형태가 빠른 속도로 변해가고 있는 가운데 가족의 의미는 더욱 넓어지고 삶의 형태와 그에 따른 욕구들 역시 다양해지고 있다.
이처럼 사람들이 편리함과 행복을 위해 만들었던 제도가 시대의 변화에 따른 요구들을 담아내지 못하고 오히려 사회 구성원들을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면 제도의 수선은 필수불가결의 선택일 것이다. 그 중에서도 수술 동의 등 의료 과정 및 돌봄에 대한 가족으로서의 권리는 혈연과 결혼으로 맺어진 이들 뿐만 아닌 그 누구보다 환자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삶 속에서 이미 가족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고 있는 환자의 실질적 동반자들에게도 보장되어야 마땅하다.
또 대중들에게 시대의 변화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사회 구성원들에게 불안을 안기고 고민과 절망만을 더하는 기존의 가족 제도에 대한 문제점들을 지속적으로 알리고 사회 구성원의 일원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정부에 요구하고 투쟁을 통해 제도의 변화를 이끌어내자. 그러기 위해선 언젠가는 반드시 우리가 원하는 삶과 권리를 쟁취할 것이라는 믿음과 함께 변화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많은 이들과 더욱 연대하고 함께 목소리를 내야 할 것이다.
덧붙임
낙타 님은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