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학생인권조례야, 학생들이 공부만 하면 되지!”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안을 만들기 위해 청소년 활동가들이 서울시민 9만7천명의 서명을 받으려 발로 뛸 때에도,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위해 서울시의회 의원회관 앞에서 1인 시위를 할 때에도, 그리고 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안 원안 통과를 위해 점거농성을 벌일 때에도, 정말 수없이 들어야 했던 말이다. 하지만 얼마 전 기사화되었던 전국 1등을 강요하는 어머니의 압박에 못 이겨 어머니를 살해한 한 고등학생의 이야기는, 공부만 하면 되는 학생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일 수 있는지 다시금 생각해보게 한다.
“임신 출산하고 집에서 애나 보고 살림이나 하지 학교는 왜 다니려고 하는지 걱정되네요.” -주찬식 시의원
그리고 이것은 학생인권조례가 성적 지향과 임신 출산을 차별 금지 조항으로 반드시 포함할 것을 촉구하는 시민들의 문자에, 한 서울시의원이 보냈다는 답장의 내용이다. “애나 보고 살림이나 하”라는 둥 아이를 돌보고 가사 노동을 하는 일 자체를 폄하하고 있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교육을 받을 권리가 국민의 권리로서 보장되어 있는 나라의 시의원이라고 하는 사람의 입에서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임신 출산의 경험을 가진 학생들의 학교를 다닐 권리를 부정하는 말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이 실로 놀라울 뿐이었다.
따옴표로 묶여 있는 위의 두 개의 문장 사이에는 어떤 공백이 있다. 학생들에게 공부만 하라고 해놓고 다른 한편으론 임신 출산한 학생에게는 학교에 다니지 말라고 하는 이 앞뒤 안 맞는 이야기는, ‘학생이 아닌 학생들’을 만들어낸다. 때문에 성소수자 학생에게도 차별받지 않고 학교에 다닐 권리가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 그리고 임신 출산한 학생에게도 수업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 학생들 또한 학생’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일이다. 또 동시에, 그것은 이들 또한 학생일 수 있기 위해 학교는 어떤 공간이어야 하고 보장되어야 할 학생의 인권이란 어떤 것이어야 하느냐는 질문을 던지고 또 그에 대해 답해가는 일이기도 하다. 바로 이것이 어제 서울시의회를 통과하여 제정된 서울시 학생인권조례를 만들어왔던 과정들이었다. 노동자나 여성, 장애인, 흑인의 인권을 이야기하는 일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것은 인권의 개념을 확장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학교를 상상하고 만들어가며 그것을 바꾸어나가는 것에 관한 일이었다.
학생 인권 vs 교사의 교권?
“학생인권과 교권, 모두 지킬 수 있는 방안은 없을까요?” -12월 17일 SBS 뉴스, 앵커의 말.
“학생으로부터 폭언과 욕설, 매 맞는 교사가 더 많습니다. 교육을 포기하는 현상이 쓰나미처럼 전국에 퍼져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어서는 우리의 교육은 없습니다. … 인권이라는 과장된 이름은 교사의 교육권을 침해합니다.” -12월 19일 서울시의회 본회의에서 열린 학생인권조례에 관한 찬반토론 중, 김덕영 시의원.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반대하는 측에서 주로 내세우는 논리 가운데 하나는 학생 인권이 교사의 교육권을 침해하고 위협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교사의 교육권이라고 하는 것은 애초에 학생들이 교육을 받을 권리로부터 나오는 것이고, 따라서 교사의 교육권은 교사가 그러한 학생들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 잘 실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교육의 내용과 방법을 고민하고 결정할 수 있는 자유인 것이지, 교사가 학생들의 권리를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교사가 없는 학습은 가능하지만 학생이 없는 수업은 불가능하다. 교사의 교육과 관련한 자유와 권리는 학생의 (의무가 아닌) 권리와 대립할 수 없는 것일 뿐 아니라 그로부터 비롯하는 것이며, 그렇다고 한다면 학생들의 권리를 제한하는 교사의 교육권을 주장한다고 하는 일은 그 스스로의 기반을 깎아 먹는 일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실 실제 학교 현장에서 교사의 교육권을 위협하는 것은 학생 인권이 아니라 교사들의 과도한 업무 부담이다. 교사들이 학교관리를 위한 업무 보조와 행정업무에 대한 부담으로 인해 수업을 준비하고 진행하는 데 최선을 다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오랫동안 학교 현장의 현실이었다. 또한 최근 교사들을 대상으로 일어난다고 하는 학생들의 몰카나 폭행, 폭언 사건들이 ‘교권 추락’의 사례들로 언급되곤 하는데, 이러한 사건의 원인은 학생들의 인권이 ‘이미’, 그리고 ‘지나치게’ 보장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가 여전히 학생들을 인권의 주체로 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인권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이 마치 무슨 땅따먹기 게임을 하는 것이라도 되는 것인 양, 편을 가르고 그 권리를 조각내서 어느 쪽이 더 많이 가질 것인가를 경합하는 문제로 몰아가는 이러한 태도는 사실 그리 새로운 것도 낯선 것도 아니다. 여성들이 자신들의 인권을 말하는 것은 남성들의 인권을 ‘침해하는’ 것쯤으로 여겨지곤 한다. 여성들이 자신이 여성답지 않을 권리에 대해 이야기하면, 바로 남성들에게도 남성답지 않을 권리가 있지 않냐는 질문이 따라붙는다. 대체 누가 남성들에게 남성답지 않을 권리가 없다고 했는가? 대체 누가 남성들이 남성답지 않을 권리에 대해 말하는 것을 막는가? 사실 남성들에게 남성답지 않을 권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막는 것은, 여성답지 않을 권리를 이야기하는 여성들이 아니라 남성은 남성답고 여성은 여성다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다. 여성들이 자신이 여성답지 않을 권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오히려 남성들에게도 남성답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에 중요한 상상력의 지점을 제공해주는 것이 아닌가?
어제 서울시의회 본회의에서 열린 학생인권조례에 관한 찬반토론에서 한학수 교육의원은 “학생인권조례는 학생과 교사 간 갈등을 조장하는 나쁜 조례”라고 말했다. 하지만 대체 누가 학생과 교사 간 갈등을 조장하고 있는가? 대체 누가 학생의 인권을 특권이라고 멋대로 해석하면서 학생의 인권과 교사의 교육권을 대립시키고 있는가? 결국 이들이 이야기하는 교사의 교육권이라고 하는 것은 ‘학생의 인권을 제한하는 것’ 이상의 다른 것이 아니며, 학교 현장에서 꼭 필요한 교사의 교육권에 대한 건강한 이야기들이 나오는 것을 가로막는다.
걱정이라는 탈을 뒤집어쓴 편견과 혐오
학생인권조례에 대한 또 하나의 중요한 반대 ‘논리’는 성적 지향과 임신 출산을 차별 금지 조항으로 넣는 일이 동성애와 학생들의 임신 출산을 조장하는 일이므로, ‘선량한’ 학생들이 잠재적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자못 성소수자 학생들이나 임신 출산을 경험하는 학생들이 겪게 될 어려움이나 고통에 대해 걱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들의 이야기는 그 학생들의 피해를 만들어내는 혐오와 차별의 태도들을 조장하고 있는 것임에 다름 아니다.
문득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의 방영중지를 요구하며 쏟아졌던 보수 단체들의 혐오 발언들이 떠오른다. 그들은 하나 같이 내 아들이 게이‘가 되는’ 상황을 상상해볼 것을 촉구하였고 그것이 얼마나 끔찍할 정도로 걱정스러운 일인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지만 ‘내 자녀가 동성애자라고 생각해 보세요’라고 하는 이 말이 왜 곧바로 동성애자들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것에 대한 반대로 이어져야 하는가? 내 자녀가 동성애자일 수도 있다면, 그리고 오히려 자신의 자녀를 진심으로 걱정한다면, 자신의 자녀가 동성애자임에도 잘 살아갈 수 있는 방법들을 고민하고 찾아가는 것이 맞지 않을까? “드라마 보고 게이 된 내 아들”이 정말 걱정되었다면, 그 아들이 “에이즈 걸리면 책임져라”라고 외치는 것보다 사실 가장 먼저 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일은 동성애가 에이즈의 원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찾아서 아는 일이었을 테다. 동성애자인 자녀가 겪어야 할 고통은, 그 자녀가 동성애자가 ‘되는’ 순간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동성애자에 대한 편견과 혐오를 맞닥뜨리는 순간에 발생한다.
한편 미혼모 학생들의 임신 출산을 ‘우려’하는 목소리는 온갖 캠페인들을 통해 메아리치고 있는 ‘저출산’이라고 하는 구호의 이중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결국 출산을 장려함으로써 재생산되길 원하는 것은 이성애 결혼제도와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임에 다름 아니며, 결혼 제도 바깥의 미혼모 학생들의 임신과 출산은 환영받지 못하는 것이 된다. 정말로 임신 출산을 경험하는 학생들의 미래가 걱정된다면, 이들이 임신 출산 후에도 그것을 이유로 원치 않게 학교를 그만두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순결 이데올로기로 인해 이들이 자신이 임신 출산을 했다는 이유로 차별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어제 서울시의회 본회의에서 열린 학생인권조례에 관한 찬반토론에서 정문진 시의원은 다른 의원들에게 “의원님의 딸 아들들 배우자가 학교 때 아기를 낳은 적이 있다면, 그 아기가 찾아온다면 받아들이겠습니까?”라고 질문하는 것을 통해 그 차별의 최전선에 서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임신 출산을 차별 금지 항목에 명시하는 것이 “소수의 성을 파는 학생들과 아이를 입양하길 원하는 불임가정 사이에 서로 아기를 사고팔게 되는 길을 만들어주는” 일이 될 것이라는 정 의원의 말은 결국 이들의 ‘우려’ 속에 감춰진 본의가 결국 임신 출산을 경험하는 학생들을 낙인찍기 위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너무나도 아쉬운 ‘2011 꼬매고 싶은 입’
“우리는 흔히 동성애 혐오적 집단 괴롭힘이 학교현장과 청소년기에 한정되어 나타나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뿌리는 더 깊숙이 있습니다. 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는 해로운 태도에 그 뿌리가 있으며, 때로는 분열을 조장하는 유명인사와, 국가 당국이 승인한 차별적인 법과 관행이 이러한 태도를 부추기기도 합니다.” - 국제인권소식 “통”이 번역한 반기문 사무총장의 메시지. (12월 8일,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에 근거한 폭력과 차별 근절 행사에 보내는 메시지)
언니네트워크는 매해 연말마다 한 해 동안 여성비하 발언 및 인권을 퇴보시키는 발언들을 모아 <꼬매고 싶은 입> 수상자를 선정한다. 안 그래도 올해는 가뜩이나 예년에 비해 풍작(?)이었을 뿐 아니라 다들 쟁쟁한 인물들이라 후보들을 추리기가 정말 힘들었는데, 지난주부터 성적 지향과 임신 출산을 학생인권조례의 차별금지항목으로 포함시킬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쏟아지기 시작한 차별적 혐오 발언들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 이전의 어느 누구와 겨루어도 전혀 뒤지지 않을 면면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만 너무도 아쉬운 것은 투표가 지난 주 초부터 진행되는 바람에 이 쟁쟁한 발언들이 올해 <꼬매고 싶은 입>에 포함되지 못할 것 같다는 것. 이에 ‘특별망언상’이라도 만들어서 별도로라도 시상하자는 언니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과 수상자 추천이 이어지고 있다. 학생인권조례 제정 과정에서 쏟아졌던 차별적 발언들, 그리고 인권에 대한 무지를 증명하는 발언들이말로, 우리 사회의 혐오와 차별이 얼마나 뿌리 깊은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학생인권조례가 필요한 이유일 것이다.
덧붙임
자루 님은 언니네트워크(www.unninetwork.net) 활동가입니다. * 이 글은 여성주의 커뮤니티 사이트 ‘언니네’(http://www.unninet.net/)의 채널[넷]에 동시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