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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교육, 날다] 인간의 ‘모든 권리’를 상상하다

청소년노동인권 활동가들과 함께 한 ‘인권의 목록과 쟁점’ 교육

얼마 전 다녀온 ‘서울시민 인권헌장제정을 위한 간담회’에서 들은 얘기다. “가정이 사회의 근본인데 성수소자 청소년의 경제적 자립을 세금으로 돕는다니 말이 안 된다.” 소속 단체 이름에 ‘청소년 보호’를 걸고 있는 사람들의 주장이었다. “한국은 에이즈청정지역인데 동성애를 옹호하자는 거냐…북한과 대치상황인데 사상의 자유가 말이 되느냐…헌장에 성소수자란 단어가 다섯 번이 넘게 언급되었는데 이거 역차별 아니냐” 등등 들으면 들을수록 대꾸할 힘조차 빠지게 하는 논리였다.

실제 인권교육에서는 저렇게 성소수자 인권을 말하며 뜬금없이 북한을 운운하는 주장보다는 “아직 어려서 판단력이 부족해 한때 동성애에 관심을 가진 것이니…”라는 식으로 말하는 이들을 더 자주 만나게 된다. “미성숙한 아이들”을 잘 이끌어줘야 한다는 보호의 논리는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 아이들아”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념의 좌우와 무관하게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논리이기도 하다. ‘지못미’를 말하는 이들은 대체로 본인들의 그런 생각이 차별 구조에 기여하고 있다는 지적을 잘 못 알아듣는다는 특징이 있다. 그렇게 소수자들을 취약한 보호의 대상으로만 묶어둘 때 소수자들의 권리는 계속 제한된다는 점에서 보호주의 논리는 인권교육에서 한번은 짚고 넘어가야하는 쟁점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인권의 보편성이라고 하지만 역사상 보편적 인권이 실현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인권을 주장하면 “너네한테 무슨 인권” 혹은 “아직 시기상조”라는 식으로 인권의 목록에서 배제됐던 존재들이 늘 있었던 것이다. 여성이든 흑인이든 비인간이 아닌 동등한 인간으로 대접받기 위한 투쟁을 거쳐 소수자들 권리가 인정받을 수 있었다. 따라서 보편적 인권이란 표현은 고정된 권리 목록에 대한 기술이 아니라 운동을 통해 보편성을 획득해 나가려는 힘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맥락 속에서 청소년노동인권을 고민하는 참여자들과 ‘인권의 목록과 쟁점’을 주제로 교육을 준비할 때 출발점으로 삼은 전제는 이렇다. 인권의 저항성, 즉 인권의 역사는 인간 아닌 자들이 인간으로 초대받기 위해 기존의 당연하다고 생각되던 사고와 질서에 맞서온 과정이라는 것. 참여자들이 지난 세 차례 교육 동안 인권감수성과 반차별, 청소년인권을 살피는 과정을 거치면서 점검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이번엔 다양한 권리 목록을 떠올리는 동시에 그 목록에 초대받지 못한 존재들은 누구인지 그리고 인권의 확장을 가로막는 논리들은 어떻게 넘어설 수 있을지 함께 고민을 나누는 것이 이번 교육의 목표 중 하나였다.

권리그림카드의 내용을 함께 채우다

인권의 목록을 찾아보는 활동으로 <인권교육, 날다>에 실려 있는 권리그림카드를 응용한 활동을 준비해보았다. 올 봄 ‘인권교육 활동가를 위한 역량강화 기초 워크숍’ 때 신선한 시도로 평가됐던 ‘권리 몬스터 카드’(그림 참조)의 새로운 버전이었다. 기존 몬스터 카드의 항목으로 “권리 내용 및 효과, 속성(분류), 발동조건”이 있었던 것을 좀 더 수정하여 아래와 같은 질문을 가지고 접근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권리카드의 내용을 채운 뒤에는 좀 더 풍부한 논의를 이끄는 차원에서 인권교육 때 많이 인용하는 문장들 리스트를 주고 모둠에서 방금 논의한 권리카드와 연결해 꽂히는 문장을 하나씩 찾아달라고 했다.
1)권리 이름
2)권리의 내용(특히 누구에게 필요한 권리인지)
3)권리가 실현되기 위한 사회적 조건(다른 어떤 권리의 도움이 필요한지)
4)내가 이 권리를 쓰고 싶었던 순간
5)권리의 효과/의미(이 권리가 충분히 실현됐을 때 세상의 모습)

먼저 권리 이름의 경우에는 꼭 세계인권선언에 나와 있는 것과 같은 단어일 필요가 없다는 점을 언급했다. 가령 ‘표현의 자유’란 말 대신 청소년들이 필요한 권리로 찾았던 ‘말대꾸 했다고 혼나지 않을 권리’처럼 말이다. 자기 입에 더 붙는 말로 표현을 찾을 때 좀 더 자기 삶에 기반을 둔 통찰을 끌어낼 수 있다고 봤다. 그리고 권리의 내용을 찾을 때에는 정치적 올바름에 묶여 여러 소수자 이름만 적다가 정작 자기 문제로는 연결하지 못하는 경우를 피하고자 자신에게 이 권리가 필요했던 순간은 언제였는지를 묻는 항목을 넣었다.

권리가 실현되기 위한 사회적 조건을 찾는 것은 각 권리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인권의 상호불가분성/상호의존성)을 살피고자 했던 이날 교육의 목표와도 연결되는 부분이었다. 여러 권리 목록을 두고 몸의 자유, 마음의 자유, 사회경제적 존엄, 평화적 생존권, 저항과 불복종 이런 식으로 범주를 나누는 것이 때론 유용할지 모르나 결국 인권을 고민하는 것이 인간의 존엄한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서부터 출발한다고 했을 때 그러한 범주의 구분이 더 많은 존엄과 권리를 요구하는 데 제약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비정규직이 당당할 권리’를 찾은 모둠에서는 그 권리가 실현되기 위한 조건으로 단순히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동등한 대우를 받는 것을 넘어 ‘잃을 것을 두려워 않고 싸울 수 있는 것’을 들었다. 생존의 나락에서 더 추락할지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가 ‘먹고사니즘’으로 이어지는 한국사회에서 일터에서의 부당한 모욕을 참지 않고 싸울 수 있으려면 설령 해고되더라도 사는데 큰 걱정 안 해도 되는 사회적 안전망이 필요하단 지적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당당할 권리’가 일면 ‘마음의 자유’에 속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 마음의 자유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사회경제적 존엄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 속에서 “누구도 자신을 팔아야 할 정도로 가난해서는 안 되며, 누구도 다른 시민의 굴종을 사버릴 정도로 부유해서도 안 된다. 민주공화국이라면.”이란 문장의 의미가 더 살아날 수 있었다.
<사진 설명>‘인권교육 활동가를 위한 역량강화 기초 워크숍’때 사용했던 ‘권리 몬스터 카드’

▲ <사진 설명>‘인권교육 활동가를 위한 역량강화 기초 워크숍’때 사용했던 ‘권리 몬스터 카드’


이번 교육에서 참여자들이 채워준 권리그림카드 모습

▲ 이번 교육에서 참여자들이 채워준 권리그림카드 모습



인권의 보편성을 유보시키는 조건 살피기

모든 인간의 더 많은 권리를 상상할 때, 인권의 보편성을 유보시키는 조건들은 무엇인지 알아야 그 조건들을 넘어설 방도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노동인권을 고민하는 참여자가 많아서인지 “일할 권리/일하지 않을 권리/일을 선택할 권리”처럼 일과 관련한 내용이 많이 나왔다. 이를 두고 보다 존엄한 노동조건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찾다보니 “여가시간 확보”나 “돈이 없어도 편안한 사회”와 같이 더 많은 복지에 대한 논의들로 토론이 전개됐다. 그러다 기본소득 얘기가 나오자 “일할 의지가 없는 사람에게도 지원을 하는 것은 좀 아닌 것 같다”는 말을 한 참여자가 조심스레 해주셨다. “누구에게나 조건 없이”라는 기본소득의 문제의식이 쟁점을 촉발한 것이다.

사실 사회권 논의에서 반론으로 자주 맞닥뜨리는 ‘무임승차’나 ‘복지병’ 논리는 더 많은 권리를 주장하는 것을 방해하는 대표적 주장 중 하나이기도 하다. 사회경제적 존엄을 실현과 관련하여 사회와 국가가 맡아야 하는 역할과 책임을 생각하기보다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의 부족을 원인으로 돌릴 때 사람들은 못난 자기 탓을 하거나 정당한 권리 주장임에도 스스로를 검열하게 된다. “주인 아주머니께...죄송합니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라는 쪽지를 마지막으로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가 죄송한 것은 대체 무엇이며 그렇게 스스로 죄송하다는 말을 하게끔 만든 건 누구인가.

예컨대 최근의 ‘카톡’ 사찰 사건에서 많은 사람들이 보여준 분노에서 볼 수 있듯이 자유권은 비교적 쉽게 인권의 문제로 인식되는데 반해 상대적으로 사회경제적 존엄의 훼손은 인권의 문제로 쉽게 인식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서울역의 노숙인에 대해서 “게을러서 문제야”라고 말한다거나 최근의 판교 환풍구 추락 사고를 두고 “안타깝지만 올라간 사람이 잘못”이라는 것처럼 문제가 되는 상황의 원인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이다. 하지만 빈곤이나 안전의 문제는 결코 개인만의 몫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질을 묻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이면 누구나 누려야 할 공통된 자유의 의미”(류은숙)로 접근할 때 안전의 의미를 재구성하고 안전할 관계를 위한 더 많은 권리를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는 찔끔찔끔 주며 생색을 내는데 그나마 라도 받기 위해 “자신의 비참함을 증명”(바티스트 밀롱도)해야 하는 모순적 상황은 “남의 온정과 시혜에 기대서 생존해야 하는, 이미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된 상태”로 인식될 필요가 있다. “잔혹성의 한계를 잃어버린 자본주의 체제와 이 체제가 강제하는 삶의 공포 앞에 짓눌린 이들이 지금과는 다른 세계, 다른 삶의 형식을 발명할 수 있는지”(홍세화)를 묻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인간의 모든 권리를 상상하기 위해 짊어져야할 인권의 고민은 아닐까.

부당한 질문을 되돌려주기

“사회적 약자란 다름 아닌 부당한 질문을 받는 자”(정희진)라고 했을 때, 그런 부당한 질문의 문제는 더 많은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자유롭게 놀 권리”를 찾은 모둠에서 그 권리가 실현되기 위한 조건으로 “직업 차별 철폐”를 적은 것은 어떤 일을 하느냐에 따라 자유를 누릴 시간조차 갖지 못하는 열악한 노동현실을 문제로 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 “다 놀기만 하고 복지혜택 받으려고 하면 그 세금은 누가 벌어서 내느냐”는 반박이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자유롭게 놀 권리”를 말할 땐 왠지 더 조심스러워지고 눈치를 보게 되기도 한다. 여차 하면 “무조건 노는 건 아니에요”라거나 “제가 그런 세금도둑은 아니에요”라는 식의 수세적 핑계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국방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비겁한 병역거부자”라는 말에 “병역거부자는 비겁한 게 아니라 다만 총을 들지 않는 방식으로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대응할 때가 있었다. 이런 대응 논리는 “연약한 여성을 지켜주는 용감한 남성”이라는, 병역거부가 애초 극복하고자 했던 기존 가부장제의 남성성에 기대는 모순을 낳았다. 이 모순을 피하기 위해 택한 방법이 “우리는 비겁하지 않다”고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겁’한 게 왜 문제인지, 인간의 연약함을 부정하는 것이 오히려 진짜 문제는 아닌지” 되묻는 것이었다. 군대를 기피하는 이기주의 아니냐는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부당한 질문을 비틀어 거꾸로 “군대의 존재 이유는 무엇이며 병역기피가 정말 ‘문제’인 것인지, 누구를 위한 국가안보인지”를 물었을 때 ‘살상을 거부할 권리’가 등장할 수 있었다.

인권의 목록과 쟁점을 다루는 것은 역사적으로 ‘인권’이란 말이 어떤 존재의 이름 뒤에 따라왔는지를 다시금 상기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동성애자/노동자/흑인/여성 인권이란 말은 있어도 이성애자/자본가/백인/남성의 인권이란 표현은 어색하게 들리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즉, 인권의 역사는 그동안 ‘인간 아닌 자’였던 이들이 자신들도 동등한 인간이고 권리를 가진 존재라는 것을 인정받기 위해 싸워온 역사였다는 것을 상기할 때 지금의 인권 목록들을 더 채워나갈 수 있는 촉을 벼릴 수 있을 것이다.
덧붙임

날맹 님은 '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