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인 주> 국가보안법 제정 60년인 12월 1일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는 각계 인사들이 참가한 선언문을 발표했습니다.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는 국가보안법의 조속한 폐지와 더불어 국회에 발의되어 있는 '유사국가보안법제'의 제정과 개정을 저지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할 것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국가보안법 제정 60년을 맞는다. 국가보안법 60년은 씻을 수 없는 야만의 깊은 상흔을 한민족 구성원 모두에게 남겼다. 국가안보의 이름으로, '반공'이라는 명분 앞에, '분단'의 질곡 앞에 국가보안법이라는 악법으로 저질러진 악행은 이루 말로 다 형언할 수 없다. 국가보안법이 지배하는 야만의 시대에는 인간의 양심과 자유와 민주주의는 처참하게 유린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지 못한 채 우리는 오늘을 맞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 60년 국가보안법에 희생된 많은 이들의 이름과 얼굴을 모두 떠올릴 수조차 없다. 한국전쟁 전후 시기 이승만 독재정권은 자신의 정권에 반대할 수 있다는 개연성만으로 얼마나 많은 이들을 죽였던가. 박정희 정권은 무고한 이들을 비밀정보기관으로 끌고 가 치 떨리는 고문 끝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간첩으로 만들었던가. 그들 만들어진 간첩들과 그 가족들은 얼마나 고통스런 세월을 살아야 했던가, 그리고 사형대에서 죽음의 길을 떠나야 했던가. 전두환 정권 시절에도 반공법까지 흡수한 국가보안법의 이름으로 이제 성장하기 시작한 진보운동 조직들이 파괴되었으며, 그들 조직에 속했다는 이유만으로 끌려가 당해야 했던 참혹한 폭력 앞에 울지도 못했던 그 많은 영혼들을 우리는 기억한다. 민주화시대가 열렸다는 20여 년의 세월 동안에도 계속되었던 국가보안법의 폭력, 그 야만의 기억들…그 야만의 시절을 덮어두고는 국가보안법을 말할 수 없다.
국가보안법이 지배하는 시대에는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하는 '인간'은 있을 수 없었다. 국가보안법이 지배한 60년은 국민들의 의식 속에 아직도 '빨갱이'에 대한 공포를 남겨 놓았다. 이성적인 사고와 판단이 불가능한 의식의 감옥을 남겨 놓았다. 정권에 비판하는 목소리는 법으로 단죄되어야 할 불온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정당한 주장이라도 북한의 주장과 유사하다는 이유만으로 수년 동안 감옥에 갇혀야 했던 상황을 어떻게 정상적인 민주국가에 일어났던 일이라고 할 수 있는가. 국가권력이 강요하는 반공 이데올로기 외에 다른 사상과 다른 생각을 허용하지 않는 그 엄청난 폭력을 우리는 어떻게 다 말로 할 수 있는가. 그로부터 자본주의 체제를 넘고자 한 모든 사상적인 실천은 국가보안법에 의해 원천 봉쇄되었고,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를 추구하던 노력들은 차단되었다. 그리하여 한반도 남단 대한민국에서는 어떤 진보정당과 진보운동은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소수 계급과 계층만을 위한 사회·경제구조와 정치구조가 강화되었고, 굳어져 버렸다. 경직되고 획일화된 사회가 가능했던 것은 국가보안법을 앞세운 사상탄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엔의 시민·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조약에 가입한 지도 벌써 18년, 대한민국은 유엔의 일원으로서 그리고 조약의 가입국으로서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는 국가보안법 폐지 권고를 거듭 거듭 받아왔다. 국제사회에서 국가보안법을 이유로 인권침해국가로 분류되는 상황에서도 이 나라 정부 당국자들이나 국회는 아직도 국가보안법의 털끝 하나도 바꾸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제는 남과 북의 정상들이 합의한 대로 상호 적대적인 법들을 정비해가야 할 단계이지만 이명박 정부는 그마저도 거부한 채 다시 국가보안법을 앞세운 공안 통치를 획책하고 있다. 사노련 사건이니 실천연대 사건이니 하는 사건들을 만들어내고, 공안기구들을 강화하고 있으며, 국민들을 철저하게 감시, 통제할 법적인 근거를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된 반동의 정치권력을 우리는 보고 있다. 국가보안법과 유사 국가보안법제들, 그를 통한 국정원의 권한 강화, 그를 통한 정보·공작정치로의 회귀를 획책하는 이명박 정권을 국가보안법 제정 60년이 되는 오늘 보고 있지 않은가.
그동안 국가보안법의 폐지를 위해 우리는 수많은 노력을 경주하여 왔지만 국가보안법에 기생하여 기득권을 수호하기에 여념이 없는 반동세력들이 장악한 정치권력에 의해 번번이 국가보안법 폐지운동은 좌절되고는 했다. 그럼에도 우리의 노력으로 국가보안법은 많이 약화되었고, 자유의 범위가 확대되고 국가보안법의 자의적 적용은 어렵게 되는 등 우리의 방어선은 강화되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북한을 적으로 규정하고, 언제라도 북한과의 통신과 회합을 이유로 국가보안법으로 자유를 박탈할 수 있는 상황은 지속되고 있다. 자본주의를 넘어 다른 세계를 꿈꾸는 진보사상에 대한 탄압은 언제나 가능하다. 아직 국가보안법이 살아서 그 생명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보안법을 이대로 두고는 어떤 자유도 허상임을, 국가보안법에 터 잡아 국민을 감시하고, 통제하기에만 여념이 없는 공안기구들을 그대로 두고는 민주주의는 불가능함을, 소수 부자들만의 정치경제 구조를 넘기 위해서는 자유로운 진보운동의 진전은 어렵다는 점을, 분단의 현실을 넘어 남과 북의 통일로 나아가야 할 계제에 남과 북의 극단적인 대결을 획책하는 반동, 분열세력이 지배하는 이 구도를 두고는 평화를 말할 수 없음을 우리는 다시 확인하다.
우리는 국가보안법을 한사코 인정할 수 없다. 악법인 국가보안법은 우리에게 저항과 불복종의 대상일 뿐이다. 악법은 어겨서 깨뜨려 왔던 전통 위에서 우리는 국가보안법을 어겨가면서 국가보안법을 끝내 끝장내고야 말 것이다. 아울러 당면해서는 유사 국가보안법제를 만들어 다시금 국민들의 자유를 더욱 옭죄려는 어떤 기도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공안기구를 더욱 강화하려는 그 모든 시도와 이명박 정권과 우익세력들의 민중생존권과 민주파괴 책동에 적극 싸워 나갈 것이다.
이제 우리는 선언한다. 야만의 역사를 걷어내고, 민주주의와 인권이 꽃피는 세상을 한시라도 빨리 앞당기기 위해서 오늘 여기에 모인 우리는 국가보안법의 폐지를 위해 치열하게 싸워나갈 것을 엄숙히 선언한다.
2008년 12월 1일
국가보안법 제정 60년 각계 선언 참가자 6,278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