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은 아름다워 보고 게이된 내 아들 AIDS로 죽으면 SBS 책임져라!’
(9월 28일 조선일보에 바른성문화를위한국민연합(아래 바성연)의 이름으로 실린 광고의 문구)
- 그들은 하나님을 대변하는 권위를 갖고 있다고 스스로 주장하며, 또한 하나님이 동성애를 증오한다는 주장에 기초해서 동성애자들에 대한 자신들의 증오를 정당화한다. 성경의 거룩한 본문이 이 사람들의 복음주의적 광신을 뒷받침하는 타당한 권위이다.
(존 쉘비 스퐁의 <성경과 폭력> 중에서. 171쪽. 여섯 가지 이유 있는 걱정 다섯 번째 쟁점포럼 임보라의 발제문에서 재인용)
- 사실 그들은 성적 지향이 무엇인지 모르고 차별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배제’의 질서가 사회 질서라고 믿는 이들, 누구를 배제할 것인가를 결정할 권리가 자신들에게 믿는 이들에게 성적 지향은 단어 뜻 그대로가 아니라 배제의 근거이자 표식일 뿐이다. 배제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오히려 포함되기를 거부해야 한다.
(여섯 가지 이유 있는 걱정 다섯 번째 쟁점포럼 한채윤의 발제문 중에서 인용)
(9월 28일 조선일보에 바른성문화를위한국민연합(아래 바성연)의 이름으로 실린 광고의 문구)
- 그들은 하나님을 대변하는 권위를 갖고 있다고 스스로 주장하며, 또한 하나님이 동성애를 증오한다는 주장에 기초해서 동성애자들에 대한 자신들의 증오를 정당화한다. 성경의 거룩한 본문이 이 사람들의 복음주의적 광신을 뒷받침하는 타당한 권위이다.
(존 쉘비 스퐁의 <성경과 폭력> 중에서. 171쪽. 여섯 가지 이유 있는 걱정 다섯 번째 쟁점포럼 임보라의 발제문에서 재인용)
- 사실 그들은 성적 지향이 무엇인지 모르고 차별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배제’의 질서가 사회 질서라고 믿는 이들, 누구를 배제할 것인가를 결정할 권리가 자신들에게 믿는 이들에게 성적 지향은 단어 뜻 그대로가 아니라 배제의 근거이자 표식일 뿐이다. 배제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오히려 포함되기를 거부해야 한다.
(여섯 가지 이유 있는 걱정 다섯 번째 쟁점포럼 한채윤의 발제문 중에서 인용)
2007년 11월, 국가인권위원회 권고법안에서 성적지향을 비롯한 7개 차별금지사유 항목을 삭제한 차별금지법안을 법무부가 들고 나왔다. 성소수자 진영을 비롯한 각계의 반대 성명서를 비롯하여 개인과 단체를 아우르는 많은 차별‘조장법’ 저지를 위한 활동들이 이어졌다. 다음 해 국회 회기를 넘겨 그 법안은 사라졌지만 차별금지법 국면이 끝난 것은 아니다.
차별금지법과 성적지향을 둘러싼 2010년 국면은 이미 진행되고 있다. 올해 안에 법무부 산하 차별금지법특별분과위원회는 차별금지법 초안을 마련하고 공청회를 할 예정이다. 이에 발맞추어 보수 기독교계는 ‘동성애를 허용하는 차별금지법에 적극 대응해야 한다’며 8월에 바성연을 결성한 후, 동애 반대 모임과 기도회를 열고 있다. 또한 ‘며느리가 남자라니’라는 광고(5월)와 <인생은 아름다워> 상영 반대 광고(9월) 등 동성애 반대 광고를 냈고, 공청회에서 차별금지법에 성적 지향이 들어가는 것을 막겠다고 결연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둘러싼 국면은 2007년 겨울과 마찬가지로 또 다시 성적 지향이 ‘뜨거운 감자’가 될 것이다. 약 3년이 되어가는 지금, 차별금지법은 예전대로인 듯하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성적 지향을 문제 삼는 동성애허용법안반대국민연합(아래 동반국)은 ‘바성연’으로 이름을 바꾸고, 여전히 차별금지법에 성적 지향이 차별금지사유로 들어가는 것을 반대한다. 이러한 상황은 예전 그대로이지만, 2007년 이후 반차별 운동에 대한 고민과 논의가 경험으로 축적된 것은 이전과는 다르다.
반차별공동행동은 지난 10월 7일 저녁 다섯 번째 쟁점포럼 <차별금지법 제정의 뜨거운 감자 '성적지향/성별정체성'>을 주최하였다. 이 자리에서는 차별금지법에서 성적 지향과 성별정체성이 어떠한 위상을 지니고 있는지, 법 제정 과정에서 또 다시 대면하게 될 보수 기독교 세력의 호모포비아에 어떻게 대응할지를 고민을 나누었다.
차별금지법에서 성적지향/성별정체성이 갖는 위상
차별금지법에서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은 일부 소수 ‘당사자’에게만 해당하는 사안이 아니다. 물론 소위 ‘당사자’가 더 민감하고 직접적인 영향을 받을 수는 있지만, 이런 사유들이 단지 ‘그들만’을 위한 것이라고 여기는 건 낙인 효과만 더 강화하여 차별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수 있다.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은 특정 소수를 불쌍히(?) 여기기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섹슈얼리티를 사회적 차원에서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구성된다.
일단 섹슈얼리티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섹슈얼리티는 성을 둘러싼 일련의 욕망과 인식, 행위와 금기 전반을 아우르는 용어이며, 이 개념에는 사회적 규범과 그에 따른 제도, 성적 재현물 등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옷 입는 방식, 식사 예절, 술이나 음료 마시기, 요리, 양치습관, 화장실 사용법, 거울보기, 목욕하는 방식, 말투와 글투, 앉고 서고 걷는 습관, TV나 영화를 뭘 볼지 정하는 과정, 친구·동료·가족과 갖는 관계의 방식, 연애하기, 지하철에서 멍하니 맞은 편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 (무의식적인) 잠자는 습관에 이르기까지, 섹슈얼리티는 이 모든 것에 다 스며있다. 우리는 일상으로 섹슈얼리티를 반복적으로 – 또한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 수행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섹슈얼리티를 얘기한다는 것은 살아가는 삶을 본다는 것과 같다. 또한 그 삶을 설명하고 맥락화 하는 언어를 찾는 방법이기도 하다. 섹슈얼리티를 키워드로 자신을 설명하다 보면 내가 갖고 있는 편견을 인정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고, 내가 갇혀 있는 낙인의 틀을 보게 된다. 타인에 대한 욕망을 드러내게 되고, 무심코 넘어가던 감정들 – 애정, 호감, 분노, 증오, 좌절, 부러움, 우월감, 공포 등이 모순되게 공존하는 – 을 당혹스럽고 낯설게 만나게 된다. 그래서 섹슈얼리티를 경유하여 차별을 인식하려는 시도는 자기 일상에서 반복 수행하고 각인 받는 편견과 금기를 드러내며, 삶 속에서 내가 겪는 차별과 행하는 차별을 원근감 있게 보여 준다.
섹슈얼리티는 차별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 매우 주요한 기제이다. 때문에 차별금지법에 차별금지사유로서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 등 섹슈얼리티 관련 사유를 적절히 담는 작업은 핵심적이다.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 등이 다른 사유보다 더 우월하거나 우선하는 건 아니지만, 섹슈얼리티와 관련된 사유들이 지니는 위상은 ‘그 법이 반차별적 법이냐, 그냥 금지만을 위한 법이냐’를 판가름할 만큼 대표성을 지닌다.
현재의 국면을 파악하자
하지만 섹슈얼리티가 갖는 성적 지향/성별 정체성의 의미는 부각되지 못한 채, 차별금지법을 둘러싼 대립 국면은 ‘동성애 대 반동성애, 혹은 퀴어 대 보수 기독교의 대립’으로 읽히곤 한다.
바성연을 비롯한 보수 기독교 집단은 동성애는 죄악이지만, 동성애자를 혐오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자신들이 낸 광고로 동성애자들이 상처받았다면 유감이지만, 청소년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라고 한다. 성서에 쓰인 구절을 언급하며, 신의 말씀에 따라 ‘불쌍한 그들을 긍휼히 여겨 올바른 삶으로 이끄는 게 신 앞에 옳다’고 말한다. 그들은 에이즈에 대한 공포심을 가져와서 동성애와 성윤리, 종교적 교리를 잇는 접착제로 사용한다.
사실 그들이 내세우는 논리적 근거들은 매우 빈약하다. 의학, 병리적 근거는 ‘과학적으로’ 틀렸으며, 종교적 교리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을 무시하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그 근거의 옳고 그름은 사실 핵심적인 게 아니다.
그들은 종교적 근본주의적 원칙이나 도덕관과는 무관하게 호모포비아를 행하는 것이다. 한 채윤 씨가 지적하듯이 “그들은 성적 지향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포비아’라는 말 자체가 혐오와 공포감을 동시에 갖는 단어이다. 잘 아는 것, 알고자 하는 것에 공포를 느끼기는 어렵다. 모르기 때문에, 알 필요가 없다고 여기기 때문에 공포를 느끼고 혐오감으로 이어진다.
그러면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성적 지향/성별 정체성은 알 필요가 없다고 만들고, 차별금지법에 차별금지사유로 들어가는 것에 반대하게 할까? 성서의 말씀? 아니다. 그것은 표면적 이유, 이유를 위한 이유일 뿐이다. 실재로 그들의 입장은 정치적으로 ‘보수’이며, 자본의 ‘이익’을 대변할 뿐이다. 임보라 목사가 존 쉘비 쉬퐁의 글에서 인용한 ‘신의 이름을 빌린 자신들의 증오할 권위’의 물질성이 바로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적 지향/성별 정체성을 차별금지사유에서 배제함으로써 누가 이득을 취하거나 유지하게 되고, 누가 억압받고 누락되고 삭제되고 곡해되어 유통되는지 살펴야 한다. 특정 종교의 교리 자체가 아니라 그와 연결된 정치 담론, 경제 담론, 문화 담론, 생체 담론을 보아야 한다. 그럼으로써 유지되는 사회적 관점이 누구를 대변하고 누구를 배제하는지를 보아야 한다.
그렇게 보면, 차별금지법에 성적 지향/성별 정체성을 둘러싼 국면은 동성애 대 반동성애, 혹은 퀴어 대 보수 기독교의 대립이 아니다. 한 채윤 씨의 말처럼 “성적 지향은 단어 뜻 그대로가 아니라 배제의 근거이자 표식일 뿐이다.” 거기에 자신이 속한 교단의 원칙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채 안정감을 느끼고자 하는 다수와 그들이 헌금하는 돈이 배치되며, 종교적 이유이든 몰라서이든 호모포비아와 트랜스포비아를 문화적 상품으로 유통시키는 사회적 인식이 배치된다. 더불어 국제인권규약에 따르고 국가 브랜드 가치에 집착하는 정부의 요구에 따라 법무부가 차별금지법을 만들어야 할 필요가 이 대립 국면의 옆에 배치되며, 이를 어떻게 해석할지 정하는 권위를 지니는 시정기구와 사법부, 이 법을 통해 구제를 받는 이들의 맥락이 배치된다.
차별금지법 제정운동을 반차별 담론을 확장하기 위한 운동으로서 동성애 대 반동성애, 혹은 퀴어 대 보수 기독교의 대립의 구도에서 벗어나, 섹슈얼리티 – 성적 지향/성별 정체성 –를 통해 차별을 인식하게 하는 방향으로 만들어지기를 바란다.
차별금지법은 국가의 반차별 선언이자 차별감수성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종용 할 수 있다. 때문에 우리가 차별금지법을 제대로 만들어야 하고, 잘 사용되도록 애써야 하는 이유이다. ‘제대로’와 ‘잘’의 여부를 측정하는 주된 바로미터 중 하나는 섹슈얼리티 –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 – 가 될 것이다.
덧붙임
김준우 님은 반차별공동행동 활동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