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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공룡트림] 학교에 동물이 간다면(1)

“야, 너 이리 와 봐. / 6학년이 이러니까 / 다른 애들도 다들 뛰는 거 아냐 / 너 사람과 동물이 / 다른 게 뭔 줄 알아?” // ‘뛰었다고 벌주는 거요’ (강삼영, 「하지 못한 말」, 『동시마중』창간호, 2010년 5월)

뛰고 춤추고 노는 것이 생명이 가진 본성의 한 영역이라면, 학교의 규율은 이를 허용하지 않는다. 어린이를 ‘동물과 비슷한 야만인으로 여기고, 어떻게 하면 문명화된 인간처럼 행동할지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 시대의 확고한 법칙 아닌가. 질서를 잘 지키고, 예의바르고 착한 아이로 자라야 한다. 이런 현실에서, 동시「하지 못한 말」은 ‘어린이 문명화’가 어린이 삶에 넘치는 생명력을 붙잡아 두고 있다는 점을 그렸다. ‘뛰었다고 벌주는’ 현실은 “물고기처럼 자유롭게 날고 싶다”던 한 초등학생의 유서 속 글귀와 겹치는 대목이다. 뛰고 싶지만, 날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 속에 산다.

어린이들은 동물을 좋아한다. 동물 흉내내기를 통해 동물이 되어 보기도 한다. 규율과 틀에 얽매이지 않고 본성에 따라 자유롭게 움직이는 그 모습을 좋아한다. 어린이들이 동물 흉내내는 모습이 한 편의 동화가 되기도 한다. 작가 현덕은 『고양이』, 『고양이와 쥐』(1939)와 같은 동화 속에서 아이들이 고양이가 되고, 쥐가 되어 노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고양이가 되어서는 쥐를 쫓고 북어를 훔쳐다 뜯어 먹으며, 쥐가 되어서는 찍찍 거리며 고양이를 피해 달아난다. 이 안에서 어린이들은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되어 몸 전체로 놀이한다.

그림책 속 동물을 두 가지 차원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동물이 등장하여 어린이에게 인간이 되는 법을 가르치는 수단이 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인간 존재의 한계를 뛰어 넘는 초월적 타자로서 또 다른 체험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에 비추어 볼 때, 현덕의 『고양이』와 『고양이와 쥐』는 후자의 측면에서 ‘동물’을 바라본다고 할 수 있다. 동물이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지만 ‘동물흉내’를 통해 어린이는 새로운 체험을 맛본다. ‘고양이 모양을 하고 고양이 목소리를 하고, 그리고 고양이 가던 데를’ 간다.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되는 즐거움을 추구하는 어린이의 욕구와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임태희의 『내 꿈은 토끼』(바람의 아이들, 2006)역시 토끼가 되고 나비가 되는 어린이들이 등장한다. 판타지의 차원으로 승화되었기 때문에 현덕의 동물 흉내내기와는 좀 차원이 다르다. 현덕의 아이들이 자기들에게 주어진 여백의 시간에 무얼 하고 놀까를 고민하며 동물 흉내를 냈다면, 임태희의 아이들은 협소하고 억압적인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동물이 되길 원한다. 단지 흉내내기가 아니라 진짜 동물이 되어 버린다. 탈출과 벗어남을 추구하는 욕망이 응축되어 터져 나온 판타지의 세계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는 제도에 희생된 어린이라고 하는 현대의 문제의식이 내포되어 있다. 모범생이었던 은호가 토끼가 되고 싶다고 외치는 곳은 바로 교실 안이다. 토끼를 선언한 이후엔 “문제집을 냄비에 넣고 팔팔 끓”이고, “공책에 만화를 그려”넣는다. 그리고는 진짜 토끼가 되어 교실 밖으로 나가 풀이 훌쩍 자라 있는 뒤뜰에서 무위의 시간을 보낸다. 은호의 토끼선언은 억압적인 ‘교실’과 자유로운 ‘뒤뜰’이라고 하는 대립 축을 세워 팽팽한 긴장관계를 만들어 놓았다. 교실은 어린이의 욕구와는 거리가 먼 존재로 한 쪽에 위치하게 되고, 토끼나 나비와 같은 동물과 그들이 뛰어노는 뒤뜰은 어린이의 자유의지와 욕구를 자유롭게 실행하는 존재로서 다른 한 쪽에 놓이게 된다.

놀이를 선사한 동물들

임태희의 『내 꿈은 토끼』에서 어린이가 동물이 되어 날아가는 것이 자유로움을 선사하지만 한 측면에서는 패배의식이 느껴진다. ‘은호’는 토끼로 변하고, ‘나’는 나비로 변했지만 교실에 남겨진 아이들은? 교실과 뒤뜰은 여전히 분리된 채로 남겨져 있다. 문명과 동물을 대립적 관계로 보는 비관적 의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학교’로 상징되는 근대의 제도는 결코 변할 수 없는 확고한 것이기에 내가 동물이 되어 뛰쳐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 된다.

사실 더 큰 해방감을 선사하는 ‘축제’는 교실을 뒤뜰로 만들어 버리는데 있지 않을까. 다시 말하자면, 어린이가 동물이 되어 뒤뜰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동물이 들어와서 교실을 뒤뜰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아주 오래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고등학교 시절 기만적이나마 학교에서 학생의 날로 주어졌던 ‘축제’를 잊을 수 없다. 선생님의 지휘봉을 따라 공부하던 교실은 우리들이 찍은 사진과 우리들이 그린 그림이 걸린 전시장이 되고, 구령에 맞추어 뜀뛰기를 하던 운동장은 우리가 즐겨 듣고 부르는 노래 소리에 맞춰 춤을 추는 댄스장으로 변한다. 야자타임이 즐거운 것은 그 안에 흔들리지 않는 나이에 대한 위계질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학교의 공간이 학생의 공간으로 바뀌는 것이 주는 즐거움은 그 안에 수동적으로 칸칸이 채워져 있는 어린이, 청소년이 존재한다는 의미다. 축제의 해방감은 그 안에 내재된 근본적인 속성이 흔들릴 때 발생한다. 따라서 축제적 즐거움의 밑바탕에는 ‘권력’문제가 놓여 있게 마련이다.

김옥의 『학교에 간 개돌이』는 1999년 첫 출간 당시부터 큰 호응을 얻었는데, 강아지의 시점에서 준우라는 아이의 일상을 뒤집어 보여주는 것과 구성진 사투리의 사용이 해학성과 재미를 더해준다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완성도 있고도 신선한 관점을 선사했다는 점에서 『학교에 간 개돌이』에 대한 평가는 논란의 여지가 없을 듯하다. 여기서는 좀 다른 측면에서 이 작품의 의미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바로 학교-어린이-강아지라고 하는 축과 그것이 만들어 내는 긴장감 속에 벌어지는 재미에 대한 탐색이다. 사실 이 작품의 진짜 사건은 제목처럼 개돌이가 학교에 간 것에 있다. 김리리의 『화장실에 사는 두꺼비』(문학동네어린이, 2007)에서 변비에 걸린 준영이 앞에 갑자기 두꺼비가 나타나는 것과는 맥락이 다르다. 두꺼비는 준영이 앞에만 나타났다 사라진다. 변비가 없어진 뒤에 같이 사라진 두꺼비는 준영의 꽉 막힌 억압된 내면을 반영하는 판타지적 존재에 해당된다. 하지만 개돌이는 아이들 앞에 그야말로 진짜 ‘개’로서 존재를 드러낸다. 학교에 ‘개’는 금지되었건만 개돌이는 그 사정을 모른다. 그저 학교에 다니고 싶을 뿐이다. 교실로 쫓아 들어가서는 “걸상에 반듯이 앉아 꼼짝도 하지”않는 준우가 안쓰러워서 “차가운 발가락”을 “혓바닥으로 쓱쓱 핥아”주고, 급기야는 “책상 밑의 다른 아이들 발 사이를 헤집고 다니기 시작”한다. 지루한 교실에서 재미난 일이 펼쳐지기를 바라는 어린이 독자가 진짜 바라는 이야기, 진짜 재미를 느끼는 부분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본다. 하지만 개돌이가 벌인 이 반란은 그저 작품에 재미를 더해주는 작은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준우네 반 아이들이 “준우네 개 땀시 공부 못 하겠어요”라는 반응을 보인다던가, 개돌이가 집으로 돌아오며 “공부하는 건 쉽지 않지만, 친구들도 있고 라면도 먹고 학교는 좋은 데구나. 내일 또 준우를 따라가야지”라는 결말을 보자. 이는 개돌이 덕에 학교에 새로운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만족시키기보다, 학교는 원래부터 참 재미있는 곳이라는 ‘따뜻한 시각’을 만들어내는 데에 더 초점을 맞추게 된다.

개돌이의 작은 반란과 달리 『금두껍의 첫수업』(김기정, 창비)은 교실을 일상과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바꿔 버린다. 『학교에 간 개돌이』가 현실의 맥락이 흔들리지 않는 일상성 속에 벌어진 작은 사건 같은 것이라면, 『금두껍의 첫수업』은 과감한 상상력을 동원한 환상 동화다. 어느 날 “교과서랑 공책을 펼쳐 놓고 선생님이 오길 조용히” 기다리는 아이들 앞에 두꺼비가 나타난다. “풀쩍풀쩍 뛰어다니다가, 마침내 교탁 위에 착” 앉는다. 그리고는 침을 꼴깍이며 숨죽이고 있는 아이들 앞에서 멋지게 “지나가던 파리 한 마리를 날름 잡아 꿀꺽 삼키”었다. 마침내 “아이들이 엉덩이를 들썩하며 소리를 질러”대고, 몇몇은 “짝짝 손뼉까치 쳤”다. 지루하던 아이들이 기뻐서 들썩이기까지 두꺼비의 활약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두꺼비는 선생님으로 변신하여 들어와 교실을 뒤뜰로 바꿔버린다. “책상에는 풀빛 이끼가 끼었고, 교실 바닥엔 물이 찼으며, 교실 벽에는 넝쿨들이 뻗어”갔다. 공간이 바뀌었으니, 이 안에서 벌어지는 일도 달라질 수밖에. 아이들은 메기가 되고, 개구리가 되고, 물방개가 되고, 잠자리가 되고, 나무가 되고, 종달새가 되어 뛰논다. 결국 작품 속에 등장한 두꺼비는 학교에 가기 싫어하던 검지와 지루하게 책상에 앉아 있던 아이들에게 ‘축제’를 제공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고얀놈 혼내주기』(시공주니어, 2006)는 학교 안에 결코 일어날 법 하지 않은 재미난 사건을 만들어 내는 존재로서 ‘동물’들이 등장한다. 그 주인공은 바로 우리들이 “무릎을 굽히고 눈을 낮추”고 “고개를 숙이고 귀를 기울”이고 보면 보이는, 우리 주변에서 우왕좌왕 흔하디흔하게 살고 있지만 평소에 인식하지 못하는 도시의 동물들이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고얀놈 혼내주기』는 삼양초등학교 2학년 7반에서 실제로 일어났다는, 반 아이들이 똥치운 사건을 모티브로 한다. 숲속에 똥이 떨어져 있다고 해서야 문제될 것이 없지만, 학교에서 화장실이 아닌 다른 곳에 똥이 있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그야말로 ‘사건’인 것이다. 아무데나 버려진 이 똥은 화장실 안의 배설물이 가지고 있는 잘 다듬어진 문명화와는 거리가 멀다.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적인 동물성과 연결이 된다. 권정생의 『랑랑별 때때롱』에서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고도로 발달된 문명 도시에 들어가서 벌인 불복종 저항이 있었는데, 이는 바로 화장실이 아닌 들판에 볼 일을 보는 것이었다. 이 소박한 유머 속에는 문명을 거부하고 자연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하는 의도가 숨어 있다. 문명의 공간에 버려진 배설물은 그만큼 의미하는 바가 크다. 고얀놈인 주먹똥이 화장실이 아닌 학교 바닥 어딘가에 볼 일을 보도록 꾀를 쓴 것은 도시 속에 함께 살고 있는 매미, 고양이, 쥐, 참새가 벌인 일이다. 주먹똥이 화장실이 아닌 곳에 아무데다 똥을 누어 버리는 순간, 주먹똥은 매미, 고양이, 쥐, 참새와 같은 위치에 서게 된다. 표면적으로는 동네 동물들 괴롭히는 고얀놈을 혼내 주는 이야기이지만, 사실은 그 동물들의 작전 덕분에 주먹똥네 반 아이들은 똥 치우기 작전이라고 하는 즐거운 사건을 만나게 되는 것이 『고얀놈 혼내주기』의 내부에 흐르고 있는 생동감 넘치는 재미의 원천이 된다. 한 판 크게 놀 수 있었으니 즐거운 일이다.

개돌이, 두꺼비, 매미, 고양이, 참새 등등은 어린이 일상에 잠시 등장하여 즐거움을 주고 사라져 버리는 존재들로 그려져 있다. 고요한 어둠 속에 갑작스럽게 퍽하고 터져 올라가는 불꽃놀이를 보는 것과도 같다. 여기서 동물은 고요한 일상에 역동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놀이를 선사하는 존재가 된다.[학교에 동물이 간다면 (2)에서 이어짐.]
덧붙임

이선주 님은 인권교육센터 ‘들’ 활동회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