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사랑방 후원하기

인권오름 > 인권교육, 날다

[인권교육 날다] 인간계의 ‘명왕성’은 어떻게 탄생하나

청소년들과 함께한 반(反)차별 교육

학교에서 학생들의 인권교육을 의뢰할 때, 열이면 아홉 반드시 덧붙이는 말이 있다. “자기 권리만 주장할 게 아니라, 타인의 인권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세요.” 글자 그대로 문장을 이해하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자기 권리’마저 충분히 주장할 수 없게 숨통을 조이는 학교에서 ‘타인의 인권’을 존중하라 강조하는 것은 어째 좀 뻔뻔하다. 이건 마치 학생인권조례를 제대로 시행한 적도 없으면서, 학생인권조례의 과잉을 지적하며 학생들의 ‘책임’을 강조하는 서울시 교육청의 행태와 비슷하다고도 볼 수 있다. 어디 학생들뿐이랴. 소수자들이 ‘나도 사람이오.’라고 목소리를 낼 때마다 권력은 늘 ‘타인의 인권’을 제멋대로 호출해 지그시 그 술렁임을 억누른다.

인권교육이 연대의 가치를 중시하며, 나와 연결된 타자(타인)와의 공감을 참여자들과 나눠야 하는 것은 마땅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권력의 요구와 선을 긋는 반차별 교육을 진행할 수 있을까. ‘누군가를 차별하지 않는다.’와 ‘누군가를 잘 도와준다(배려한다).’를 동의어로 배워온 청소년들에게 ‘내 안의 차별 감각’을 꺼내 보도록 안내하는 길은 참 쉽지가 않다. 학생인권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열띠게 호응하다가도, 학생들 사이의 차별 문제를 언급하기 시작하면 입을 꾹 닫는다. 다음에 이어질 말이 ‘착하게 살라’는 도덕적 교훈의 언저리를 맴돌 것이라 예측하기 때문일지 모른다. 때로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외치기도 한다. “(왕따 당하는 애들은) 걔네들에게 문제가 있다니까요!” 차별의 ‘근거 있음’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차별의 ‘근거 없음’을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이와 같은 긴장이 늘 따라다니기 때문에 일회성 단시간 교육에서 반차별을 중심에 두고 교육하는 것은 상당히 부담이 된다. 이야기 할 수 있는 맥락과 환경을 조성하는 데 공을 들여야만 비로소 차별이 ‘내 탓’을 한다고, 혹은 ‘네 탓’을 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님을 조금이나마 느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소개할 교육은 1회 2시간 30분씩, 5회기로 구성된 인문학 토론 강좌의 한 꼭지였다. 강좌 인원은 17명 정도였다. 청소년 인문학 수업을 꾸준히 해온 교육공동체 ‘나다’와 함께 ‘인권을 삼킨 아이’라는 큰 제목의 강좌를 공동 기획했다.(*)

1강 (1/13) 인권, 교문을 넘다
2강 (1/14) 누구를 위한 권리인가
3강 (1/15) 괴물을 삼킨 아이- 폭력과 인권의 상관관계
▶ 4강 (1/16) 인권을 삼키다 part1. 개인을 넘어서
5강 (1/17) 인권을 삼키다 part2. 소화불량 탐구시간

앞선 1~3강에서는 학교의 구조적 폭력, 학교 구성원들 사이의 권력 관계를 읽는 작업을 수행했고, 내가 진행한 4강에서는 본격적으로 ‘우리’를 가르는 힘, 그 힘이 내 안에 남긴 논리와 습관을 살피는 데 주력했다. 인권의 근거가 ‘우리’라고 하지만, ‘우리’가 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가 되고 싶지 않은 ‘너’들의 존재를 어떻게 마주할지를 생각해보는 시간이었다. 차별과 배제의 선이 어떤 식으로 학생들의 삶 속에 그려져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 간략한 강연과 참여 활동 2가지를 배치했다.

날개 달기- 사람의 대표 얼굴

머릿속으로 30초간 ‘사람’을 그려보는 것으로 강좌의 문을 열었다. 퍼뜩 어떤 형상을 떠올린 참여자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참여자가 더 많았다. 개별적인 존재로서의 사람은 무수히 다양하기 때문에 하나의 형상으로 그려내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보편’이 그려내는 사람의 얼굴은 그 대표 형상을 갖고 있게 마련이다. 인간의 역사에서 오래토록 보편을 형성한 대표 얼굴은 남성이었다. 이 대표 얼굴이 담아내지 못한 삶의 이야기를 들추어내는 과정이 인권의 역사였다. 여성(예화: 프랑스 혁명기 올랭프 드 구즈)들이, 그리고 여성들 내부의 흑인(예화: 1851년 전미여성대회 소저너 트루스)들이, 보편의 기준을 흔들어왔던 것처럼 학생들 안에서도 질문을 던질 수 있다. 학생의 대표 얼굴은 보통 누구로 그려지나? 학생회장이나 반장으로 주로 선출되는 학생은 누구인가? 어떤 이미지와 정체성을 갖고 있나? 이러한 질문을 던지며, 사람의 값어치를 매기는 ‘기준’이 우리 안에 이미 있음을 살짝 다루었다.

더불어 날갯짓 1- 학교에서 눈에 띄는 학생은 누구

이어서 ‘사람의 인기나 매력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라는 점을 발견하기 위해 ‘학교에서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눈에 띄는 학생 찾기’ 9칸 빙고 놀이를 진행했다. 외모(신체특성), 성격, 성적, 집안, 능력(장기) 등을 고려해 모둠별로 9칸짜리 빙고 판을 채우고, 놀이를 진행했다. 각 모둠에서 찾은 예시들을 칠판에 모두 모아 적었다. 지각하는 학생, 잘 생기고 예쁜 학생, 연예인, 일진, 학생회장, 전교1등, 관심종자(지나치게 관심 받고 싶어 함), 왕따, 지적 장애 학생, 스포츠 만능 등 30여 가지 예시가 등장했다.

칠판에 적어 놓은 예시들을 왼쪽과 같은 사분면에 배치해보는 작업을 했다. 가로축은 학교가 좋거나(+) 싫어하는(-) 정도, 세로축은 학생들이 좋거나(+) 싫어하는(-) 정도를 표시한 것이다. 스포츠 만능인 학생은 리더십이 있는 경우도 많고, 성격도 좋아서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다고 한다. 학교에서도 그런 학생을 좋아한다. 전교 1등은 성격에 따라 학생들 사이에서 호오가 갈리는데, 학교에서는 많이 좋아한다. 좌표축에 배치를 하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인기나 매력 형성의 요건이 자연스레 드러났다. 큰 이견 없이 좌표축에 어떤 학생의 존재를 표시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 가름의 기준이 사회적으로 형성됨을 보여준다. 또한 인기 있는 존재들은 한 가지 속성만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예쁘고 잘생기고 공부까지 잘하는 학생들이 얼마나 많은지. 더불어 학교에서 혼나거나, 뭔가 부족해보일 때만 눈에 띄는 학생들 역시 그 ‘부정적’ 속성을 여러 가지 결합해 가지고 있다. 장애와 가난을 동시에 겪고 있는 학생들, 공부를 못하면서 지각을 줄곧 하는 학생들의 존재를 함께 떠올려보았다. 그렇다면 아예 좌표축에 등장조차 하지 못하는 학생들은 어떠할까. 이름조차 기억되지 못하고 사라져간 어떤 사람들. 학교에서 그/녀들의 삶은 있는 듯, 없는 듯 부유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여운을 품은 채 두 번째 참여 활동에 들어갔다. 조금 더 관계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룰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더불어 날갯짓 2- 나(태양)와 명왕성의 거리

나 자신을 관계의 ‘태양’이라고 가정 했을 때, 나의 태양계는 어떤 식으로 그려질까. 앞서 소개한 빙고 놀이도 마찬가지지만, 지금 소개하려는 프로그램은 활용 시 매우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친구들과 관계 맺기 자체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거나, 한 번도 관계에서 어떤 식으로든 ‘태양’의 위치에 서 본적이 없는 참여자들이 있는 경우 프로그램 자체가 폭력이 될 수 있다. 강좌 참여자들이 이전에 대부분 ‘나다’ 강좌를 한 번 이상은 수강했던 이들이라 이 공간을 편하게(혹은 안전하게) 느끼는 이들이 많았고, 앞선 1~3강에서 들려준 이야기들에 비춰볼 때 심한 따돌림 문제를 현재 겪고 있는 참여자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는 (어디까지나) 추측 속에 진행할 수 있었다. 모든 이야기를 다 꺼내진 않아도 되고, 할 수 있는 만큼만 적어보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사람만 들려달라는 식의 요청도 함께 건넸다. 그리고 참여자들의 관계 맺기 방식 자체를 서로 평가하거나, 비난하는 방식으로 흐르지 않도록 대화를 이끌었다.

위와 같은 그림이 그려진 종이를 참여자 각자에게 나눠주었다. 태양에서 가까운 순서로 ‘단짝- 적절히 친하게 지내며 같이 그룹을 형성하는 사람- 나랑 상관없으면 되는 사람- 우리 반에 없었으면 하는 사람’을 떠올려보기로 했다. 각자 생각하고 메모하는 시간을 가진 후,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신이 태양계에 적어 놓은 사람들은 대략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는지를 중심으로 결과를 나눴다. 관계의 역학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를 테면, 단짝으로 주로 꼽히는 사람들의 핵심적인 특징은 ‘쿨함’이다. 나의 태양계에서 명왕성 쯤 위치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눈치 없음, 달라붙음’ 등이다. 누가 관계 맺기에 쿨 할 수 있을까. 굳이 타인에게 매달리지 않아도, 다른 사람을 쉽게 사귈 수 있는 자원을 확보하고 있는 사람은 질척거릴 필요가 없다. 성격을 바꿔서라도 이 반에, 이 그룹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길 요구받는 사람은 누구일까. 그렇다면 나는 타인에게 어디쯤 위치하고 있을까. 명왕성이 태양계로부터 퇴출 되었듯, 인간계로부터 ‘탈락’한다는 것은 어떠한 공포일까. 순간순간 이야기에 몰입해 골똘히 생각에 빠져드는 참여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머리를 맞대어 - ‘자격 없는 자’들의 반란을 꿈꾸며

참여 활동을 마무리하며, ‘명왕성’의 위치를 강요받는 사람들이 주로 듣게 되는 말들이 무엇인지 꼽고 그 맥락을 짚어봤다. “네 성격부터 고치고 봐야지.”, “왜 이렇게 나대?”, “실력이 안 되니까 무시 받지. 서러우면 노력해서 인정받아.” 등등 가시 돋친 말들이 일상에 차고 넘친다. 왜 학교는 ‘모두가 사이좋게 지내라’는 불가능한 미션을 학생들에게 요구하고, 모두의 기준에 맞춰 눈치껏 행동하길 기대하는 걸까. 나대지 말라는 말 앞에는 기실 ‘자격도 안 되면서’ 라는 말이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의 학교에서, 사회에서 모두들 노력하면 정말 성공할 수 있는 걸까. 아니, 성공이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러한 질문들을 던질 때 비로소 기준과 등급, 줄 세우기 그 자체를 문제 삼을 수 있다. 정글에서 살아온, 살아남은 ‘우리’의 몸에는 정글의 습관이 잔뜩 배어 있다. 그 습관들은 ‘나’와 ‘너’가 서로를 미워하고, 질식하게 만든다. 우리가 서로의 숨통을 트일 수 있는 길은 ‘나’와 ‘너’를 키운 그 뿌리를 응시하는 것, 그리고 낯선 ‘너’를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반차별 교육의 목표라 생각하며, 이번 교육은 청소년들과 그 목표를 조금이나마 나눌 수 있었다는 점에 의미가 있지 않았나 싶다.

(* http://nada.jinbo.net/vacation/139995 로 들어가면, 전체 5강의 상세 흐름을 볼 수 있는 겨울 특강 공문 파일을 다운로드 받을 수 있습니다.)
덧붙임

한낱 님은 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