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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교육 날다] 노동자에게 학생인권이란?

민주노총 조합원들을 향한 학생인권조례 선동 혹은 교육

참 애매하다. 30분~1시간 남짓 되는 강연도 인권교육이라 불러야 할까. 인권교육센터 ‘들’에는 한 달에 20~30건 정도 교육 요청이 들어온다. 100명 넘는 사람들을 모아 놓고 1시간 남짓 교육해달라고 요청이 들어오면 먼저 인원수와 시간을 조율하고,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경우 상당수 거절의 답장을 보낸다. 참여자들이 스스로 토론하고, 질문하고, 탐색하는 과정이 곧 인권교육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되도록 강연만 하게 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다. 계속해서 위와 같은 형식의 교육 요청을 받아들이게 되면 너무도 익숙하고, 정형적인 틀 (강사 중심, 일방향성)이 바뀔 수 없다는 생각에 일종의 ‘보이콧’을 하는 것이다.

물불 가리지 않고, 학생인권!

그런데 가끔은 이런 철학 혹은 자존심을 버려야 할 때가 있다. 통칭하자면, ‘급할 때’다. 언제가 급한 순간인지는 활동가들의 ‘깜’으로 알아차리는 것이겠지만, 청소년인권운동을 하고 있는 내게, 주민발의로 서울시 학생인권조례를 만들려는 노력의 결과가 아슬아슬해보이는 지금은 아주 아주 급한 때다. 그래서 요즘은 ‘학생인권’을 주제로 한 교육이라면, 교육 형태에 대한 특별한 고려 없이 열심히 나가고 있다. 조례 주민 발의가 성사되려면 서울 시민 1%의 서명을 모아야 한다. 8만이라는 숫자가 참으로 큰 숫자라는 걸 요즘 절감한다. 온라인은커녕 주민등록번호와 주소를 모두 기입한 서명지 원본을 모아야 하는지라 얼굴도 모르는 시민들이 거리에서 서명을 해주는 경우는 많지 않다. 이럴 때 일수록 ‘우리 편’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의 움직임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 거리 서명을 받을 때 종종 듣게 되는 “애들은 맞으면서 커야지요!” “저는 폭력에 찬성하는데요?” 와 같은 말들에 상처를 받기도 하지만, 사실 더 큰 상처는 ‘우리 편’에서 온다. 차별받는 존재들이 느끼는 서러움은 쉽게 공감대를 형성하기도 하지만, 사실 그 존재들 사이에도 위계는 있다. 운동에 발을 담그고 있다고 해서 모두가 ‘순결한’ 것은 아니며, 운동 사회 안에서도 성차별, 학력차별, 나이차별이 곳곳에 들어차있다. 그렇기에 노조 조합원이나 운동 단체 활동가들 안에서의 인권교육은 중요하다. 자기 안의 껄끄러운 지점, 불편함 지점을 툭 터놓고 이야기해야 소수자라고 그룹화 되어 있는 ‘다른’ 존재들에 대한 이해(왜 다른 존재로 느껴지는가, 라는 근본적 물음을 포함)가 가능하고, 그래야 ‘말로만 연대’의 관성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노동자에게 학생인권이란 어떤 의미인가?’ 라는 질문을 노조 조합원 분들께 던진 계기도 이러했다. 생각보다 노조 조합원 분들이 ‘흔쾌히’ 주민발의 운동에 동참하지 않는 이유는 일말의 불편함과 껄끄러움에서 비롯될 것이다. 그것을 드러내고 한바탕 이야기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교육시간은 30분에서 한 시간 남짓. 대의원 대회 등을 앞두고 여는 강연으로 배치된 학생인권 교육은 참여자가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소통하기엔 한참 부족한 시간이었다. 돌이켜보면, 이건 교육이라기보다 선동에 가까웠다. 나는 최선을 다해 ‘10대를 훌쩍 넘긴 내가 왜 이 운동에 절실히 매달리고 있나’를 말씀 드렸지만, 얼마나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는지는 모르겠다.


노동자와 학생, 무엇이 무엇이 똑같은가

한국 사회에서 노동자와 학생들의 처지는 처절하고, 서럽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어떤 존재가 그 사회에서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는 그이들에게 허용된 화장실 수준을 보면 알 수 있다. 일용직 노동자들이나 버스 노동자들이 제대로 된 화장실이 없어 일하는 중간에 ‘알아서’ 볼 일을 해결해야하는 것처럼, 학생들도 학생 수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은 화장실 때문에 고생을 한다. 서비스 노동자들 역시 바쁜 업무 시간 때문에 방광염과 변비를 일상처럼 달고 산다. ‘똥 쌀 권리’마저도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처우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부당함에 대해 질문을 던져야 보이지 않던 존재들의 인권이야기가 비로소 시작될 수 있다.

두발 자유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1987년 당시 현대중공업 노조 위원장이었던 이갑용 씨는 노조를 결성하고 노동자들이 1순위로 해결하고자 한 것이 ‘두발규제’였다고 말한다. 당시에는 공장 문 앞에서 노동자들의 머리를 바리깡으로 밀어버리는 일이 성행했다는 것. 이 때 의 두발은 노동자들에게 단순히 머리카락이 아니라 굴종, 체념, 부끄러움, 억울함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두발의 자유를 주장한다는 건 사람답게 대접받을 권리를 요구하는 일이었다. 20년 전 공장 앞에서 벌어지던 일이 지금은 학교 앞에서 이루어진다. 학생들의 두발 자유 외침을 쉽게 폄하할 수 없는 이유를 노동자들의 망각된 기억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학교에서 행하는 ‘간접 체벌’과 2007년 독일에서 문제가 되었던 콜센터 ‘서있기 체벌’도 마찬가지다. 너무 적은 계약을 맺은 사람은 선 채로 통화하게 하고, 팀장이 뜨개바늘로 성과가 부진한 부하 직원들에게 속도를 내도록 콕콕 찌르고 다닌 사건은 독일 사회에서 꽤나 논란이 되었다. 학교에서 규율을 몸에 배게 하고, 공부 효율을 높이기 위해 학생들을 벌 세우는 모습과 꼭 닮았다. 이렇듯 ‘신체형’을 경험하며 학생과 노동자는 멸시와 모멸감을 느끼고, 결국은 그 모든 결과를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며 무기력해진다. 학교에서도 회사에서도 ‘노예화 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은 매한가지다.


학교에서 무엇을 배우나

학생인권운동도 참으로 어렵게 진행되고 있지만, 노동 운동 역시 어려운 고비를 맴돌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다. 왜 사람들은 뭉쳐서 함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어떻게든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끝나지 않는 쳇바퀴를 돌리는 것일까? 평등하고 수평적인 의사 결정 구조를 만들지 못하고 끊임없이 조직이 관료화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고민의 굵직한 뿌리는 학교에서 발견할 수 있다. 12년 동안 학교는 똑같은 인간형을 찍어낸다. 경쟁과 업적 너머를 상상하지 못하는 인간, 폭력 이외의 다른 문제 해결 방식을 찾지 못하는 인간, 주어진 규칙과 정답을 넘어서지 못하는 인간, 명령과 위계에 복종하는 인간……. 교육이 사람을 길러내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지금의 학교 교육은 ‘인권친화적인’ 인간을 전혀 길러내지 못하고 있다. 학교를 졸업한다고 해서 그 기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학교에서 경험한 폭력과 차별, 무시의 경험은 사람과 공동체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긴다.

학교는 ‘노동친화적인’ 인간을 길러내지도 못한다. 지금 현재 노동을 하고 있는 청소년이 있을 뿐만 아니라, 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98%는 노동자가 될 사람들이다. 학교는 노골적으로 반노동 정서를 가르치고, 노동을 배반하는 방식으로 교육한다. 학생인권은 단순히 두발자유, 체벌금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학생들이 자존감 있게 성장할 것이냐’를 중심에 둔 싸움이다. 아직은 미약하나마 조례의 항목에 노동인권교육 시간을 의무화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부모와 자식은 연대할 수 있을까

조합원 분들의 상당수는 10대 자녀를 둔 부모다. 노동자의 이름으로 교육에 참여했지만, 자식을 둔 부모의 입장에서 학생인권을 생각하게 된다. ‘학생인권 대 교권’의 프레임을 넘어서는 것도 상당히 지난한 과정이지만, 솔직히 말하건대 ‘자식권 대 부모권’의 충돌을 넘어서는 데는 아마도 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 싶다. 연대를 하기 위해서는 역으로 거리두기가 필요할 때가 있다. 청소년 인권이 대표적이다. ‘청소년은 누구의 소유물도 아니다. 스스로 독립된 주체다.’라는 것이 1989년에 만들어진 UN아동권리협약의 기본 정신이다. 거리두기를 부모 버전으로 말한다면 ‘탯줄 끊기’다. 한국의 부모와 자식은 정서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쉽사리 끊어지지 않는 탯줄로 연결되어 있다. 스무 살이 되어도 여전히 탯줄은 강고하고, 죽을 때까지 이 탯줄이 이어지기도 한다. ‘다 애들을 위해서 그러는 거다.’라는 부모들의 진심, 그러나 어디까지나 합리화일 수밖에 없는 이 심리적 유착을 깨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다. 부모들은 자식의 교육비를 벌기 위해 야근을 하고, 자식들은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야자를 하고 학원에 다닌다. 다들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자식에게 공부를 강요하지만, 개천에서 용 나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는 것, 개인이 죽을 둥 살 둥 노력해봤자 대다수는 비정규직인 시대가 되었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노동의 불안과 체제의 위기를 개별 가족들에게 떠넘기는 이 오래된 수작. 학생인권을 고민한다는 것은 어쩌면 한국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커다란 악순환의 고리를 하나 끊어내는 일이다. 그만큼 중요하면서도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일터에서 서러움을 겪는 노동자, 어떻게든 자식을 위해 일할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에게 학생인권은 매우 불편한 이야기다. 그러나 아무리 ‘우리 아이들을 위한’ 최고의 선한 행동도, 그 ‘아이들’의 입장과 견해가 빠져있다면 그것은 권리가 아닌 권력임에 분명하다. 연대는 평등한 관계일 때만 가능하다. 그렇다면, 때로는 부모의 권력을 놓는 것이 결국은 자본의 권력에 균열을 가하는 것은 아닐지. 교육 중 몇몇 분들이 ‘애들은 미성숙하고, 스스로 자유를 두려워한다.’는 솔직한 생각을 꺼내놓으셨다. 통제에 익숙한 사람에게 자유는 해방의 기쁨이기 이전에 불안이다. 불과 30년 전만 해도 여성이 미성숙하다는 이야기는 공공연한 진리였다. 얼토당토않은 논리들을 말로 넘어서는 것은 쉽다. 그러나 ‘청소년 인종주의’를 실천적으로 넘어서는 것은 쉽지 않다. ‘내 자식’이 아닌 ‘독립된 존재’로서 청소년을 대하는 것, 그것이 연대의 첫걸음 아닐까.
덧붙임

한낱 님은 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