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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네 방앗간] 아파서 불안한 게 아니라, 불안해서 아픕니다만...

피로 누적으로 병가를 내고 동거인의 돌봄을 받는 ‘호사’를 누리면서, 운동부족의 비혼 여성 N 씨는 그녀의 길티 플레져(guilty pleasure, 은밀한 즐거움, 떳떳하지 못한 즐거움)인 건강정보를 알려주는 교양프로그램을 시청한다. 안젤리나 졸리의 예방적 유방암 수술 덕에 요즘 건강정보 프로그램의 단골 소재는 유방암. 패널 중 1인이 유방암 예방에는 적극적인 건강검진만한 것이 없다고 하는 이야기에 고개를 주억거리다 유방암의 원인을 이야기하는 다른 패널의 말에 순간적으로 눈을 치켜뜨고 말았는데.

“출산을 하지 않는 것이 원인인데.....피조물로 태어나서 애도 낳고 그러고 살아야 되는데 그런 것을 ‘거역’한 것은.....”
“적어도 애 낳고 한 애한테 6개월 이상의 모유수유를 해야 애도 면역력이 좋아지고 본인도 유방암 발병률이 낮아집니다.”


유방암의 원인으로 출산하지 않음, 모유수유하지 않음이 종종 지적되며 그 덕에 결혼하지 않아 출산가능성이 없을 것으로 예상되는, 비혼 여성이 유방암의 위험군으로서 불안감을 가지는 것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원인 분석 뒤에 따르는 ‘건강’을 위한 권고를 듣자면, 비혼 여성에게 짝 지워진 질병과 건강에 대한 불안은 다양한 조건 속에 있는 여성의 현실과 여성의 결혼과 출산, 육아로 인한 불건강에 대한 성찰이 부재한 서술들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결혼해서 애 낳는다고 ‘건강해지지’ 않는다

반농담으로 (반은 진담이라는 말) 비혼 여성은 아플 때 ‘결혼하면 또는 애 낳고 나면 다 괜찮아진다’는 말을 듣곤 한다. 특별히 여성 질병으로 여겨지는 생리불순이나 자궁내막증만이 아니라 힘들어서 피부가 뒤집어져도, 여드름이 많이 나도, 배가 아파도, 머리가 아파도, 우울해도 종내에는 거의 대부분의 증상이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에’, ‘음양의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어서’ (이 해석의 함의는 이성애 파트너와의 성관계와 출산을 하지 않아서) 라는 원인으로 설명되곤 한다.

그러나 실상 결혼 제도 속에서 여성은 임신, 출산, 육아 등을 통해 다양한 병을 경험한다. 임신 중의 다양한 위험은 차치하고서도 출산 후 5-8% 여성이 갑상선 질환을 겪으며 급격한 신체/생활의 변화, 육아 스트레스 등으로 인한 산후 우울증을 경험하는 여성들 또한 적지 않다. 아이의 건강을 증진시킨다는 모유수유에 대한 기대에 부응하려는 여성들은 “유두는 갈라져 피가 나고, 딱지가 앉을 새도 없이 아이가 또 젖을 빨아대는” 것을 참아내지만 임신, 출산, 모유수유와 관련된 일련의 고통의 스토리는 모성애 신화에 가려져 가족 건강의 관리자이자 육아의 책임자로서 여성이 당연히 감내해야할 것으로 이해될 뿐이다.

임금노동의 유무와 별개로 대부분의 여성이 가사노동을 전담하는 현실 역시 여성의 불건강에 깊숙이 개입되어 있다. 여성이 경험하는 사고의 절반이 집에서 일어나며 가사노동과 관련된 다양한 독성물질들 – 청소 세제, 표백제, 세탁 세제 등 – 에 접촉함으로써 지속적인 위험에 노출된다. 신체적 불건강 뿐 아니라 정신적 불건강 또한 문제인데 제시 버나드는 전업주부들이 경험하는 신경증, 기절, 불면증 등 정신과 증상들을 연구하여 “주부가 되는 것이 여자를 아프게 한다.”라고 결론내리기도 했다.

가족 건강의 관리자로 호명되는 아내, 어머니로서의 여성은 젊어서는 아이를 돌보고 더 나이가 들어서는 노년의 부모 세대를 돌보고 본인이 노년이 되어서는 배우자를 돌보는 등 평생에 걸쳐 돌봄 노동을 하면서 (최근에는 노년에 다시 손주 세대를 돌보는 일까지) 각종 신체부위별 통증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100세 시대 대비 여성노인의 가족 돌봄과 지원방안’ 보고서에 따르면 “여성노인은 일일 평균 9.55시간, 주당 평균 65.03시간 동안 배우자를 돌보는데 시간을 할애했는데 반가량은 만성질환을 앓고 있었으며 질환별로는 119.9%는 관절염, 67.5%는 암과 요통 및 좌골신경통, 30%는 고혈압 등(복수응답)을 앓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압축적으로 나열한 증상들을 살펴볼 때, 호르몬 불균형 설에 자극받아 의사의 권고대로 “일찍 결혼해서 애 많이 낳고 모유수유 길게” 하면서 살기에는 결혼하는 삶도 너무 ‘불안’한 삶 아닌가? 비혼 여성과 기혼 여성의 건강을 단순비교하려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가사를 책임져야할 뿐 아니라 다른 보살필 가족이 없다는 이유로 상대적으로 시간적, 체력적 여유가 있다고 여겨져 간호가 필요한 친척을 돌보는 일이 비혼 여성에게 낙점되는 일이 비일비재하기에 가사나 돌봄에 의한 불건강은 남의 일도 아니다.

문제는 여성의 건강이 ‘구조적으로 여성에게 어떤 일이 할당되는가, 실제적으로 어떤 고통을 경험하는가’라는 차원에서 분석되지 않고, 출산하는 몸으로서의 ‘정상성’에서 벗어난 정도만으로 분석되기 때문에 여성이 임신, 출산, 가사, 육아, 돌봄을 통해 경험하는 불건강은 불안의 요소로 인식되지 않고 상대적으로 비혼 여성의 (재생산과 관련된 신체 부위의) 불건강만이 과하게 염려의 대상이 된다는 점이다.


‘비혼=불안’이라고 안내하는 1차선 도로

‘비혼 여성’의 건강이 문제가 아니라 ‘여성의 건강’이 문제라는 것을 인정해도 남는 질문들은 있다. “아프면 혼자 어떻게 할래, 남편은 없어도 애 없이 나중에 늙어서 어떻게 할래, 돌봐줄 사람 없이 혼자 쓰러지면 어떻게 할래.”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 듣거나 혹은 자기 자신에게 한 번쯤은 던져보았던 질문들, 질병 그 자체보다도 질병 이후의 돌봄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들이다.

그런데 이 모든 질문의 대답을 비혼 여성이 해야 하는 것일까? 결혼 제도 ‘안’에 있는 여성도 다른 가족구성원들에 대한 돌봄 노동을 수행하고 우선적 돌봄의 대상이 되기 어려움에도 비혼 여성에게 결혼을 돌봄의 해결책으로 제안하거나 결혼 안하면 어떻게 그 문제를 해결할 거냐고 질문하는 것 이외에 다른 선택지를 내어놓지 못하는 사회의 불안정성이 비혼 여성을 아프게 한다.

낙태 시술 병원을 고발하고 낙태 처벌을 강화하는 등 낙태를 범죄화하고, 서울시 어린이 청소년 인권조례에서 성소수자, 임신/출산에 따른 차별금지조항을 삭제하려는 등 한국 사회는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결혼 안에서’ 출산하고 양육하는 것 이상으로 확장되지 못하게 통제하려는 경향을 강화하고 있다.

방송인 허수경 씨가 인공수정을 통해 딸을 낳고 양육하는 것이 크게 이슈가 되었지만 2008년 4월 '생식세포 관리 및 보호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타인의 정자를 제공받으려면 반드시 배우자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생겨 현재 결혼하지 않은 여성은 인공수정으로 아이를 낳을 수 없다. “안녕, 내 마지막 난자야.”라고 인사하기 전에 아이를 가지고 싶어도 비혼 여성의 독자적인 가족구성권은 현행법으로 제한되어 있는 것이다.

삶의 다양한 가능성들을 차단한 채로 어떻게 살 거냐고 채근하면 나오는 답은 ‘모르겠다. 불안하다.’ 밖에 없을 것이다. (이성애) 결혼과 혈연으로 이루어진 가족만이 아닌 다양한 가족구성권을 인정해주는 것, 실질적인 돌봄을 수행하는 사람, 당사자가 생각하는 가장 의미 있는 타인에게 돌봄의 권리를 줄 수 있는 제도들 등 불안으로 이어지지 않는 수많은 갈래길이 필요하다.

*참고자료

<무엇이 여성을 병들게 하는가 : 젠더와 건강의 정치경제학> 레슬리 도열 / 한울아카데미 / 2010
[여성과 남성, ‘건강’에서의 ‘성 불평등’ 문제] 경기여성웹진우리138호 / 백가흔 / 2012-06
[여성노인, 만성질환에도 배우자 돌봄] 데이터뉴스 / 김현선 / 2013-01-31
[아이에게 피까지 먹이는 심정, 남편들은 모를 거다] 오마이뉴스 / 정가람 / 2013-03-10
[결혼은 'NO' 아이는 'YES'…골드미스 新가족의 탄생] 한국경제 / 안상미 / 2010-03-16

* 사진출처
1) http://www.rodale.com/files/images/12776159.jpg
2) http://www.sxc.hu/


덧붙임

나기 님은 언니네트워크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