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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네 방앗간] 양해해주시면 안될까요?

“이번에는 좀 양해해주시면 안될까요?”

10월 11일 커밍아웃 데이(Comingout Day)를 기념해 언니네트워크와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이 ‘커밍아웃 문화제’를 개최하기 위해 마포구청에 홍대 나무무대 장소사용을 신청했지만 승인이 거부되었다. 공식적인 이유는 ‘주민화합에 지장을 초래하고 주민갈등을 유발’할 것이 예상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디서 많이 본 장면? 마포레인보우주민연대(이하 마레연)가 마포구 세 곳에 ‘LGBT 우리가 지금 여기 살고 있다’, ‘지금 이곳을 지나가는 열 명 중 한 명은 성소수자 입니다’라는 문구를 담은 현수막 광고를 게시하려고 했다가 거부당한지 이제 꼭 1년, 성적 지향 및 성별정체성에 대한 차별로 판단하고 시정을 권고하는 국가인권위원회 결정문의 잉크는 채 마르지도 않았다. 하지만 또다시 익숙한 말이 등장했다. 마레연 현수막 사건에서도 초기 마포구청의 입장은 바로 ‘양해바람’, 마레연의 현수막 문구가 문제적이니 ‘양보’해서 수정하라는 것이었다.

너희가 조용히 사라져라?

내가 할 말을 상대가 먼저 해줄 때 보통은 이심전심 공감의 표현으로 고개를 끄덕이지만, 상대의 ‘주제’에서 나올 거라고 절대 상상할 수 없는 말을 먼저 할 때는? 분노가 찾아오기도 전에 황당함에 해야 할 말조차 잊어버린다. 마포구청은 당연히 후자다. 공공장소의 사용이 ‘금지된’ 성소수자들에게 ‘양해해 달라’, ‘이해해 달라’, ‘양보해 달라’고 요청하는 마포구청은 마치 스스로를 아무런 결정권이 없는 취약한 위치로 ‘코스프레’한다. 그리고 보편적인 권리를 요구하는 성소수자들을 순식간에 특수한 혹은 과도한 권리를 주장하는 특권자로 위치시킨다. ‘공공장소’에서 성소수자가 자신을 드러내면서 지역 주민으로서 다른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는 없다, 그렇지만 마포구청의 입장을 이해하고 양해할 수 있는 아량 넘치는 단체가 될 기회는 주겠다는 것일까?

마포구청에 항의하는 기자회견[출처]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 마포구청에 항의하는 기자회견[출처]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날짜만 비어 있다면 누구나 신청해서 이용 가능한 공공장소이지만, 홍대 나무무대 인근 상인 및 주민들에 의한 민원이나 항의가 들어올 경우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에 대해서 마포구청이 고민할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 과정에서 성소수자 문화제 개최를 어떤 지점에서 고민해야 하는지를 마포구청 공무원들이나 인근 주민들에게 구체적으로 설득(성수자가 공공장소에서 커밍아웃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해 달라, 지역 주민과 성소수자들이 구체적으로 만나는 접점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일이라는 점을 이해해 달라 등)을 할 수도 있었다. 우리가 하겠다고도 했다. 마포구청과 함께 모색할 수 있는 일들은 많았다. 기득권자의 ‘인정’이나 ‘승인’을 얻기 위한 소수자의 애원이 아니라, 그 과정 자체가 민주주의를 향한 실천, 인권 운동이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이후에 성소수자에 대한 특별법이 마련된다든가,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높아지면 그 후에 적극 협조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설득하고 어떤 양해를 구하는가? 혹은 그 양해가 무엇에 기여하는가? 이미 존재하고 있는 국가인권위원회법을 무시하는 초법적 태도를 취하면서까지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사람들에게는 ‘양해’를 구하지 않는, 하지만 포괄적인 차별금지법도 존재하지 않는 한국사회에서 성소수자를 위한 특별법이 생길 때까지로 ‘양해’의 기한을 자체 연장시키는 마포구청의 태도가 그 대답이다.

마포구청에 항의하는 기자회견[출처]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 마포구청에 항의하는 기자회견[출처]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죽음조차 ‘양해’하라?

마포구청의 무식소치 때문일까? 이미 마레연 현수막 사건과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를 알고 있었던 마포구청을 생각하면, 단순히 그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적반하장(賊反荷杖)? 반은 맞다. ‘도둑’이 든 것이 ‘몽둥이’가 아니었을 뿐이다. 불평등과 배제의 피해자가 기만적인 가해자의 행위를 ‘양해’하는 우아한 관용자가 될 것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또 다른 부정의이다.

11월 30일자 “다 꺼리는 에이즈환자… 병원 문 닫을 각오로 돌봐”라는 제목의 조선일보 기사는 이런 참담한 부정의의 전형이자 극단이다. 정부가 에이즈 환자 요양사업 대상 기관으로 지정한 유일한 병원인 수동연세요양병원에서 병원의 기본적인 의료윤리의 불이행뿐만 아니라 심각한 책임방기로 중증이 아닌 환자가 입원 후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대한 조선일보의 입장은 ‘선의(善意)’와 ‘소명의식’으로 HIV/AIDS 감염인들을 ‘돌보아 왔던’ 병원 측에 대한 두둔이다. (물론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일반병원이 돈 안 되는 일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이 사건은 명백하게 HIV/AIDS 감염인에 대한 ‘사회적 타살’이다. 사회적 관계의 차단, 혐오, 무시, 차별, 불평등, 배제, 부정의와 부조리… 그런데, 이제 가해자의 ‘선의’를 고려해서 죽음까지 ‘양해’하란 말인가? 보수언론이 권력의 나발이라는 것을 몰랐던바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사악해질 필요가 있는지 인간성에 대한 심각한 회의가 든다.

이 사회에서 감염인들의 생명은 병원이 문을 닫게 될 ‘시련’보다 중요하지 않다. 의료인들은 감염될 수 있다는 ‘목숨의 위협’에도 불구하고(기자의 전문성이 딱 이 정도 수준이다) 감염인들과 함께하는 선(善)을 실천하는 사람들이자 ‘잠재적 피해자’이지만, 병원에서 ‘자유롭게 섹스 하는’ 감염인들은 너무 큰 자유와 권력을 가진 것과 동시에 ‘잠재적 가해자’로 위치지어지기 때문이다. 여기에 AIDS 감염인들이 유일하게 갈 수 있는 요양병원이 단 한 군데 밖에 없다는 사회적 조건, HIV/AIDS 감염인에게 ‘죽음과도 같은’ 낙인과 편견을 만들어내는 권력의 문제는 등장할 자리가 없다.

“… 민주사회의 특징은 우리 사회의 기본질서를 해하지 아니하는 한 다양성을 존중하고, 차별이 없는 존경과 배려로 서로를 관용할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관용은 나에게 편안한 사람들과 편안한 삶의 방식을 공유하는 공간을 내어주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불편한 사람들과 불편한 삶의 방식을 함께 할 공간을 내어 주는 것으로서 차이를 뛰어 넘는 동등과 배려와 존중을 의미한다.”[출처: 서울서부지방법원 2013.11.19자 2013호파1406결정]

민주주의의 위기와 부정의, 사회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소수자들에게 ‘좀 더 너그러워질 것’을 요구하는 것이 당연시 되는 사회, 그래서 ‘이 와중인’ 상황에 11월 20일 외부성기 형성 요건을 갖추지 못한 FTM에 대해 성별정정 허가를 한 서울서부지법(법원장 강영호)의 결정문이 마음을 울렸다. 이 결정문의 ‘관용’에 대한 요청은 ‘도덕적 가치’라기보다 ‘정치적 실천’으로서 비트랜스젠더들이 어떤 시선과 태도로 공동체의 다른 존재들을 대면해야 하는가를 제시하는,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갈등 속에서도 동등하고 평등하게 공존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FTM 트랜스젠더의 인권, 행복추구권과 필연적으로 연관될 수밖에 없는 나와 다른 존재에 대한 불편함, 그것을 조건 짓는 권력의 문제를 그냥 회피하지 않는다. 그래서 소중한 결정문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마포구청에게, 감염인 요양병원에, 혐오로 물든 한국사회에 필요한 건 사회적 소수자들이 갖추어야 할 ‘개인적 윤리’에 대한 불공정한 요구 이전에, 더 근본적인 현실을 ‘직면’하는 것이다.

우리가 ‘양해’를 요청해야 하는 것

“저랑 함께 들어가실래요?”

HIV/AIDS인권연대 나누리+의 1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리는 인권재단 사람 앞이었다. 이제 막 시작한 행사에 들어가기 전, 건물 한 쪽에서 함께 담배를 피우던 한 분이 말을 걸어왔다. 잘 모르는 사람이 함께 들어가자고 하니 엉겁결에 그러자고 대답을 하고선 먼저 발걸음을 뗐다. “같이 잡고 들어가야 해요. 어두워져서 더 잘 안보이거든요.” 옆에 있던 다른 분의 말을 듣고서야 종종 지팡이를 짚고 걸어가는 HIV/AIDS 감염인 인권활동가 윤가브리엘의 모습이 떠올랐고, 시력저하․상실은 감염인들이 많이 겪는 합병증이라는 것도 떠올랐다. 채 5미터도 되지 않는 길을 걷는 그 짧은 시간에도 별별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내가 팔을 잡아야 하나? 어디를 잡아야 하나? 아니면 내 팔을 잡으라고 해야 하나? 이 정도 속도로 걸으면 괜찮을까?’ 그 분은 어버버 하고 있는 내 팔을 잡고 짧은 길을 함께 걸었다. 나는 함께 들어가자 이야기해준 분도, 같이 잡고 들어가야 한다 이야기해준 분도, 모두 고마웠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이상할지도 모르지만, 다른 이의 삶에 아주 잠깐 ‘초대’받는 기분이 들었다.

이를테면, 우리가 직면해야 하는 현실은 이런 것이다. 감염인, 성소수자 등과 대화하거나 관계 맺을 수 있는 ‘지식’ 없이도 아무 문제없이, 타인의 외로움을 볼모로 누려왔던 우리의 ‘자유’가 있다는 것, 내가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들과 낯선 삶의 방식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 불편함을 내 삶의 공간과 분리된 어딘가로 치워버릴 수는 없다 현실에 대해서 말이다. 그때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요청할 수 있는 것은 소극적이고 불공정한 '강자‘의 변명으로서가 아니라, 함께 하겠다는 연대의 시작으로서 ‘양해’가 될 수 있다.


[[참고자료]
웬디 브라운 지음, 이승철 옮김, 2010, 『관용 - 다문화제국의 새로운 통치전략』, 갈무리
조선일보, “다 꺼리는 에이즈환자… 병원 문 닫을 각오로 돌봐”, 2013년 11월 30일 자
토리, "내가 왜 이딴 병 걸려가지고…….", 인권오름, 2013년 11월 27일 자
한겨레, “법원 “성기 성형 안했다고 ‘여 → 남’ 불허는 기본권 침해””, 2013년 11월 20일 자
홍이, “성소수자는 괜찮은데 ‘호레호게’는 안 된다?”, 인권오름, 2013년 5월 29일 자
덧붙임

몽 님은 언니네트워크 활동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