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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네 방앗간] 화병의 이유

중학교 1학년. 이제 몇 년 전인지 셈하기도 쉽지 않은 꽤 오래전 그때. 드디어 우리 학교에도 교복을 입어야 한다는 권고가 내려왔다. 반 아이들은 술렁거렸다. 왜 하필이면 우리부터야. 내년부터 입으면 안 되나. 대부분의 아이들이 입을 쑥 내밀고 볼멘소리를 했다. 어떤 친구는 모두 다 같은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게 마땅찮았고, 어떤 친구는 교복을 살 돈이 궁해 곤란했다. 나는 치마가 싫었다. 엄마가 입혀주는 옷만 유효했던 유치원 이전 시절에도 치마는 싫었다. 그래서 치마를 입을 때면 늘 받던 요구들(속옷이 보이지 않게 조신하게 앉으라거나, 나무 위나 정글짐 같은 높은 곳에 올라가지 말라거나 하는)을 일부러 못 들은 체하며, 청개구리 짓을 했다. 치마만 입으면 짝다리를 짚었고, 철봉에 매달렸다. 그렇게 내 옷장에서 치마들은 사라져갔다. 그런데 엄마도 아닌 학교가 나에게 치마를 입히려고 하다니! 이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학생의 80% 이상이 찬성해야 교복을 시행할 수 있다는 전제가 있는 걸 알고서 우리는 작당을 시작했다. 반장이었던 나는 긴급회의를 소집했고, 자체 투표 결과 교복을 찬성하는 친구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입어도 그만, 안 입어도 그만인 친구들까지 포함해도 10명이 채 되지 않았다. 우리는 선생님을 설득할 궁리를 찾았다. 먼저 내가 모두의 의견을 수렴해, 말하자면 대표발의를 한 후 각자 자신들의 의견을 첨가하기로 했다. 80% 찬성은커녕 80%가 반대하는 일이니 우리 뜻대로 될 수 있다고 확신하면서... 그렇게 이반결의(1학년 2반이었다)가 성사되었다.

드디어 교실 문이 열리고 담임선생님이 들어왔다. 교복점 사장이었는지, 교육청 직원이었는지 지금은 가물거리는 또 다른 어른이 함께였다. 교실에는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그때만 하더라도 시골 중학교의 선생님에겐 범접치 못할 어떤 위계가 있었다. 선생님은 우리의 의사를 물었고, 나는 크게 팔을 올렸다. 선생님이 나를 지목하자, 나는 비장하게 일어나 발끝에 힘을 주고 서서 합의한 내용들을 읊었다. “우리 반의 대다수는 교복을 반대합니다. 일률적인 교복은 각자의 개성을 무시하고, 놀이를 하거나 움직이기 불편하고, 보온 기능도 떨어지고, 한꺼번에 돈을 내야하는 부담도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말이 끝났고, 교실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눈에 띄게 무서워진 표정의 선생님이 반 아이들을 하나하나 눈으로 셈하며 말했다. “다른 사람은? 의견 없나? OO 말에 동의하나?” 선생님의 화난 목소리가 교실을 울렸다. 하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우리의 시나리오대로라면 이쯤에서 팔들이 쑥쑥 올라와 ‘동의합니다’를 외쳐야 하는 타이밍이었지만, 반 친구들은 꼼짝도 않은 채 앉아만 있었다. 몇 분의 시간이 흘렀을까. 선생님이 “그럼 OO만 반대한다는 거지?”라고 다그쳐 물었을 때도 침묵은 계속되었다. 나의 심장은 100m 전력질주를 막 끝낸 것처럼 뛰기 시작했다. 배신감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나는 떨리는 다리로 천천히 교실 뒤쪽으로 걸어갔다. 어른 앞에서 뭐하는 짓이냐는 선생님의 꾸지람이 들렸지만, 이미 내 손은 교실 문을 열어젖히고 있었다. 복도에 나서자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며칠 후 교육청으로부터 50% 이상 찬성이면 교복을 시행한다는 새로운 공문이 내려왔다. 선생님은 반 아이들 모두 한 명씩 따로 불러 찬반조사를 했다. 하지만 끝끝내 내 이름은 불리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가 교복을 입는 것이 결정되었다.

그 일이 있는 후 나는(정확히 내 몸은) 이상해졌다. 갑자기 칠판 글씨가 보이지 않았고, 걸핏하면 체하기 일쑤였고, 정확히 어디에 붙어있는지도 모르는 명치가 아팠고, 밤에도 말똥말똥 잠이 오지 않았고, 그래서 피곤했고, 만사가 귀찮았다. 반 아이들과 말도 하기 싫었고, 내 눈치를 보는 친구들이 짜증났다. 자꾸만 머리가 아팠고, 참기 힘든 이명이 들렸고, 점점 더 무기력해졌고, 엄마의 걱정은 늘어갔다. 읍내 의사들이 알아내지 못한 치료법을 찾아 엄마는 내 손을 끌고 시내의 병원을 찾았다. 병원 건물은 아주아주 오래되어 보였고, 그 안에는 건물만큼이나 아주아주 나이 든 의사 선생님이 앉아있었다. 몇 가지 검사를 하고, 누워보라 앉아보라 하며 한동안 내 몸을 요리조리 살피던 의사 할아버지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 “화병이네. 아이고 무슨.. 열네 살짜리가 어쩌다 화병이 났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엄마에게 아주 긴 이야기를 했다. 엄마는 진심 어린 측은지심으로 나를 위로했고, 그날 밤 나는 오랜만에 단잠을 잤다. 다음 날 나는 친구들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고, 몇 명의 친구들이 나를 찾아왔다. 선생님이 너무 무서워 입을 떨어지지 않았다고,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고, 내가 자신들에게 화가 많이 나 있을까봐 먼저 말을 걸지 못했다고, 속에 있던 얘기들을 해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교복을 입게 되었지만, 반 친구들과 나는 그것으로 어색하지 않았다. 나는 몇 달간 쓰던 안경을 벗었고, 돌을 씹어 먹어도 소화시킬 위장을 되찾았고, 두통과 이명 없이 편히 잘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나의 화병은 씻은 듯이 나았...으면 좋았겠지만, 어디 현실이 그렇게 만만한가. 그것은 단지 나의 첫 화병이었을 뿐.

지난 2월에 발표된 두 개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한국의 직장인 중 90% 이상이 화병을 앓은 적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화병의 원인으로 63.8%가 인간관계의 갈등을 꼽았다(취업포털 커리어 조사결과). 화병으로 병원을 찾는 환자도 연간 11만 5천 명에 이른다고 한다(건강보험심사평가원 보고 결과). 주목하게 되는 건 화병 환자의 60% 이상이 여성이라는 점과 명절 끝에 화병 환자 수가 급증한다는 점.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여성의 특징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우리는 관계의 갈등이 대개 소통의 부재에 기인함을 알고 있다. 휴대폰과 이메일, 메신저, 각양각색의 소셜네트워크 서비스까지. 우리는 원하는 언제든 타인과 연결될 수 있는 시스템 속에 살고 있지만, 여전히 소통은 오리무중이고, 인간관계는 어렵기만 하고, 결국 화병이 나는 세상을 살고 있는 걸까.

돌이켜 생각해보면, 반 친구들이 일부러 나를 괴롭게 할 요량으로 약속을 어긴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이것은 화병이 난 나의 입장이다. 그 달라지지 않는 결과를 만들어낸 원인들을 곱씹어 보지 않은 채, 달라지지 않은 결과만을 탓하는 것으론 화병에서 벗어날 재간이 없다. 나의 목소리가 내가 원하는 곳에 가 닿지 않을 때, 혹은 애초에 그 시도조차 할 수 없을 때의 절망과 화가 만들어내는 병은 결국 나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는 사람을 만날 때 치유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기대만으로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이제 엄마만 내 편이면 마음 든든해지던 열네 살의 내가 아니니까.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은 달라지지 않을 결과를 깨어 부술 ‘진짜’ 소통을 찾아 떠나는 일. 물론 좀 늦은 감은 있지만, 대통령도 못하는 걸 시작한다는 자부심을 갖고.
덧붙임

난새 님은 언니네트워크 운영지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