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선언은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다. 마구잡이로 불심검문을 하는 경찰에 항의하며, ‘나는 불심검문을 거부하겠소!’라고 말할 때 그것은 이미 인권선언이다. 서울시청 안 무지개 농성장에도 인권선언이 있다. 시민들이 만들어온 인권헌장에 성정체성 등의 차별금지사유가 명시되어 부담스럽다며 선포를 거부하는 서울시에 항의하며 ‘차별에 합의할 수 없다’고 외치는 목소리가 인권선언이다. 그러나 인권선언은 거창하다. 누군가 세상의 불의에 맞서 이대로 당하지 않겠다고 선언할 때 그것은 세상을 움찔하게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틈새에서 다른 사회가 열려왔다.
불심검문을 거부하는 사람이 거리의 시민 중 한 사람밖에 없더라도, 그것이 누구나 누려 마땅한 권리라는 것을 우리는 ‘인권’이라 이름 붙여 확인한다. 차별은 금지되어야 하며, 누구나 모여서 말하고 행동할 수 있으며, 모든 사람은 생명과 안전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고, 시대를 앞선 목소리들이 외쳐왔고 그것을 글의 형식으로 새겨 넣은 것이 인권선언문이다. 세계인권선언문 역시 세계대전이라는 참혹한 경험으로부터 다른 사회를 다짐하며, 앞선 시대의 목소리들을 담은 인권선언을 참조했다. 여러 인권선언은 모든 인간이 존엄하다는 선언의 변주다.
빼앗긴 권리로부터 모두의 권리를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자리에서 세월호 참사를 겪었다. 아직 돌아오지 못한 실종자를 기다리는 가족, 이미 죽어 돌아온 희생자를 가슴 아프게 그리워해야 하는 가족, 살아 돌아온 것이 미안해 차마 입을 떼기가 어려운 피해생존자들. 그/녀들만 겪은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구조하기 위해 바다로 뛰어들었던 잠수사들, 진도로 한달음에 달려가 기꺼이 자원봉사를 했던 사람들, 통곡의 도시에서 든든한 이웃이 되려고 노력했던 안산의 시민들, 사건이 전해지는 소식을 시시각각 접하며 마음을 가눌 수 없었던 수많은 국민들. 저마다의 자리로 세월호 참사가 들이닥친 문은 다를지 몰라도 우리는 하나의 경험을 나누었다. 인간의 존엄이 묻혀버리는 참담함을.
살려달라고, 살고 싶다고, 생의 가장 날 것의 목소리가 거절당했다. 죽어도 되는 사람은 없다는 믿음이 여지없이 부서졌다. 우리가 어느 자리에 있었든지 누군가의 죽음을 타인의 죽음으로만 여길 수 없었던 슬픔과 분노를 되새겨보자. 세월호와 함께 수장된 누군가의 죽음으로부터 저마다 지녀온 한 세계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누구도 겪어서는 안 될 일들-구조되지 못한 채 버려지고, 울부짖는 가족들이 밀쳐지고, 애도하는 사람들이 진압되고, 진실을 갈구하는 사람들이 혐오되고……-이 나름의 질서 안에서 버젓이 작동하는 현실 앞에서 모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다시 어디로부터 땅을 다져 세월호 참사 이전과 달라진 사회를 세울 것인가. ‘존엄과 안전에 관한 4.16 인권선언’은 인간의 존엄으로부터 땅을 다지자는 제안이다. 돈보다 생명이 소중하다는 말을 넘어, 죽어도 되는 사람이 없는 사회를 위한 우리의 권리를 ‘다시’ 선언하면서 행동하자는 제안이다. 인권의 말들은 사전이 아니라 사건으로부터 나온다. 그래서 진실을 밝히는 길은 인권선언을 만들어가는 경로이자 목표가 된다. 누군가 빼앗긴 권리는 모든 사람의 권리를 일깨우는 신호가 된다. 세월호 가족들의 증언은 그/녀들이 겪은 현실에 대한 절규이자, 세월호 참사 이전의 한국사회가 짓밟아온 인간의 존엄을 드러내는 외침이다. 그렇게 들을 때, 우리는 “끝까지 함께 하겠습니다.”라는 약속을 지킬 수 있다.
책임의 구성으로부터 다른 사회로
세월호 참사 이후 박근혜 대통령은 ‘국가대개조’를 부르짖기도 했다. 안전혁신마스터플랜의 비전으로 ‘안전한 나라, 행복한 국민’을 제시했다. 국민들을 안전하게 보살피는 자로 자신을 세우고 있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를 통해 우리는 확인했다. 안전을 외쳐온 정부는 생명과 존엄이 아닌 영토와 재산의 안전을 말해왔을 뿐이다. 규제를 벗어던진 낡은 여객선이 승객을 태우고, 단속을 벗어나 과적한 배가 바다를 다니고 있었다. 해경은 인명 구조보다 국경의 경비에 예산과 인력을 투여했다. 그런데도 정부는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고 있다. 세월호 참사의 직간접적 원인에서부터, 총체적인 구조 실패의 문제, 참사 당일 이후로 일관되게 이어진 진실 은폐와 왜곡 시도들에 대해, 정부는 그냥 묻어두려고 한다. 인권의 선언은 책임의 확인이기도 하다. 우리의 권리를 밝히는 것은 정부가 져야 할 의무가 무엇인지를 따져 묻는 과정이어야 한다.
그러나 정부만이 아니다. 세계인권선언 이후 일정한 구속력을 갖기 시작한 인권 규약들은 주로 정부의 의무를 밝히는 데에 힘써왔다. 각종 인권침해에 대해 변명만 늘어놓는 정부들에 항의하기 위한 운동과 담론의 진전도 있었다. 그러나 정부에 의무를 지우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세계인권선언 제정 60주년을 맞은 2008년, 세계의 인권 전문가들이 ‘인간 존엄성에 관한 위원단’을 구성했다. 위원단의 보고서는 “국제법은 배타적인 국가 책임 모델로부터, 공유하는 책임이란 21세기의 접근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공유하는 책임이란 무엇보다도 비-국가 행위자들도 인권을 침해하는 행위에 대해 직접적으로 책임을 진다는 걸 의미한다.”라고 밝히며 기업에 직접적인 책임을 물어야 함을 강조했다. 그 전까지, 정부는 기업의 인권침해로부터 인권을 보호할 의무를 진다고 말해왔던 것에서 한걸음 나아간 것이다. 이것은 “탈규제와 민영화의 정치가 정부의 힘을 침식하고 필수적인 정부 기능을 사기업에 넘겨주고” 있는 등의 현실에 따르는 변화의 모색이기도 하다.
“살게 하고 죽게 내버려두는” 것이 근대의 통치술이라고 했던 푸코의 지적은 세월호 참사에서도 여실히 확인된다. 가깝게는 97년 이후, 멀게는 80년대부터 한국의 정부가 보여 온 모습도 그렇다. 온힘을 다해 살아남으라, 살아남지 못하면 죽는 것이 당연하다고. 살아남는 것은 개인의 책임이 되어 경쟁의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갔고, 뒤쳐진 사람들은 오히려 능력 없는 자로 낙인 찍혔다. 죽어도 위로받지 못하고 애도되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정부가 내버려둔 상태에서 죽음으로 내모는 힘이 자본이라는 것은 점점 분명해졌다. 우리의 권리를 수익으로 바꾸는 것이 자본이라는 것도 알려졌다. 청해진해운이 과적으로 올린 초과수익만 30억 원에 이른다고 하니, 이름 한 번 들어본 기업들이 앗아가는 것은 우리가 셀 수 있는 액수를 넘어갈 것이다. 기업이 책임지게 하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 만들어져야 할 인권선언이 과거의 복기가 아니라 미래를 향하기 위한 핵심 과제다.
우리의 목소리로 선언하자
인권선언은 법이 아니다. 세월호 참사 이전과는 다른 사회의 규칙이나 규정을 만드는 것과는 다르다. 오히려 모든 규칙이나 규정이 기초해야 할 인간 존엄의 토대를 세우는 것이다. 수사권과 기소권이 있는 특별법이 사법체계를 흔든다고 했던가. 인권선언은 사법체계의 가능성이나 한계에 갇히지 않는다. 흔들려야 할 것이 있다면 흔들고, 단단하게 쌓아야 할 것이 있다면 쌓아야 한다. ‘존엄과 안전에 관한 4.16 인권선언’은 흔들어야 할 것과 쌓아야 할 것을 톺아가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질 것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는 진실과 안전을 외쳐왔다. 진실은 과거의 사실을 조사하는 것만으로 밝혀지지 않는다. ‘우리’의 시선으로 사건이 재구성될 때 진실은 이루어진다. ‘우리’가 위험을 알고 다스리고 막을 수 있을 때 안전도 이루어진다. 인권에 대해, 권리주체인 우리가 져야 할 유일한 책임이 있다면 그것은, 권리를 주장하고 누리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인권선언은 우리의 권리를 누리기 위한 행동들을 통해서 만들어질 수 있다. 누군가 우리의 권리를 안내할 수는 있어도, 정할 수는 없다. 우리의 권리를 망각시키고 누군가의 존엄이 훼손되는 것을 묵인하게 하는 구조를 각자의 자리에서 비틀기 시작해야 한다. 바꿔야 할 것들을 지목하며 저항하는 ‘우리’가 되어가는 시간은 치유의 시간이기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