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가 말했다. “피청구인(통합진보당)의 진정한 목적과 활동은 …… 최종적으로는 북한식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북한식 사회주의 체제는 …… 우리 헌법상 민주적 기본질서와 근본적으로 충돌한다.” 헌법재판소는 정당해산심판의 권한을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 말한다.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추구하는 정당에서부터 공산주의 이념을 추구하는 정당에 이르기까지” 문제 삼아서는 안 된다고도 한다. 그러나 통합진보당은 강제로 해산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대한민국이 처해 있는 특수한 상황 또한 고려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헌법재판소는 자신이 내린 결정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한다. “오히려 이 결정을 통해 북한식 사회주의 이념이 우리의 정치영역에서 배제됨으로써, 그러한 이념을 지향하지 않는 진보정당들이 이 땅에서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헌법재판소는, 결정문을 통해 ‘북한식 사회주의’라는 이름표를 달아준 무엇인가를 “정치영역에서 배제”했다.
배제된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몇 가지 실마리를 통해 배제된 것의 ‘존재와 본질’을 짐작할 수 있다. 헌법재판소는 민주주의의 본질에 대한 자유주의의 본능적 두려움을 드러낸다. “민주주의는 가난한 자들이나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자들이 수적 우세를 내세워 자신들의 의사를 일방적으로 관철시킬 수 있는 정치체제로 통용되어 왔다.” “이처럼 부정적으로 인식되었던 민주주의”야말로 민주주의의 역사를 이끌어 온 힘이라는 것을 헌법재판소는 부정한다. 세금을 낼 수 있는 부유한 자들에게만 정치적 권리를 부여하려는 지배세력에 맞서 싸워온 성과가 지금 겨우 다다른, 그러나 다시 흔들리고 있는 민주주의다. 권리의 박탈 상태로 내몰리는 다양한 사람들의 ‘수적 우세’가 점증하는 역설의 ‘정치체제’는 여전히 맞서 싸워야 할 현실이다.
민주주의가 훼손당하는 현실을 분석하기 위해 ‘계급’을 통하는 것은 사회주의 사상의 본질 중 하나다. “한 사회의 구성원을 특권적 지배계급과 계급적 개념인 민중으로 구분”하는 것도 그 표현의 하나다. 자연스럽게 “민중에게 주권이 있는 민중주체의 민주주의”라는 목적을 가질 수 있다. 헌법재판소는 ‘민중민주주의’가 “모든 국민에게 주권이 있다는 국민주권원리”와 다른 이유를 특정한 사람이 주권으로부터 배제되기 때문이며 그래서 민주적 질서에 위배되는 듯 말한다. ‘국민주권’과 ‘민중주권’은 당연히 다르다. 그러나 ‘민중=국민-@’와 같은 설명은 불가능하다. ‘민중’과 ‘국민’이라는 개념이 자리한 사상적 토대가 다르기 때문이다. 헌법재판소는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문을 통해 사상투쟁을 하고 있다.
헌법재판소의 카드
헌법재판소는 사상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두 가지 카드를 사용하고 있다. 하나는 ‘나치즘’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2.6%의 지지율을 보인 군소정당에서 37.2%의 득표에 성공한 제1당으로 변모”하는 데에 불과 4년밖에 걸리지 않았음을 제시하며 “현실정치의 역동적인 성격에 비추어볼 때” 통합진보당도 위험하다는 것이다. 통합진보당의 위험성과 나치즘의 위험성을 등치시키는 헌법재판소의 도식은 ‘매카시즘’을 떠올리게 한다. 냉전의 시대, 자유주의가 반공산주의를 통해 부활해가는 모습 말이다. ‘나치즘=전체주의=공산주의’라는 도식을 만들어낸 그들은, 자본주의 체제의 독재정권에 대해서는 ‘권위주의’라는 이름을 붙였을 뿐이다. 나치즘에 맞선 저항은 사회주의의 것이기도 했다는 역사적 진실조차 사라져버렸다. 헌법재판소가 “국회의원의 국민대표성은 부득이 희생될 수밖에 없”는 “비상상황”이라고 주장할 때 그것은 이와 같은 왜곡에 기대고 있다.
또 하나의 카드는 ‘폭력’이다. ‘국정원 내란음모 조작 사건’ 등으로 통합진보당에 덧씌워진 폭력의 이미지를 헌법재판소는 십분 활용한다. 헌법재판소도 “저항권은 공권력의 행사에 대한 ‘실력적’ 저항이어서 그 본질상 질서교란의 위험이 수반”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체제를 개혁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될 수 없다”고 못 박는다. 체제에 대한 저항에는 ‘실력적 저항’이 허용되지 않고 체제 내 저항에는 ‘실력적 저항’이 허용된다는 모순적 논리다. 민주주의나 사회주의를 실현해 가는 과정에서 국가가 독점한 물리력에 어떻게 맞설 것인가를 토론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특히 남한에서는 미국의 군사력을 무시할 수 없는데, 이 역시 토론이 불가능해진다. 저항이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처해 있는 특수한 상황”
‘나치즘’과 ‘폭력’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인식에 그대로 이어진다. 헌법재판소가 고려하는 “대한민국이 처해 있는 특수한 상황”이 바로 그것이다. “대남혁명전략에 따라 대한민국 체제를 파괴 변혁하고 전복하려는 북한이라는 반국가단체”는 남한에 고유하게 존재하는 ‘북한’의 본질이 된다. 김정은이 2015년 신년사를 통해 “인민대중 중심의 우리 식 사회주의 제도가 가장 우월하지만 결코 그것을 남조선에 강요하지 않으며 강요한 적도 없”음을 밝혔지만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그대로일 것이다. “대한민국의 민주적 기본질서는 현실적인 적으로부터 공격의 대상으로 겨냥되고 있는 상황”이며 ‘적’이 무슨 말을 해도 믿어서는 안 되므로.
헌법재판소는, “북한은 여전히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헌정질서를 궁극적으로 타도 혹은 대체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고” 있지만 대한민국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헌법 제3조는 대한민국의 영토가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임을 규정함으로써 북한은 단지 미수복지구일 뿐 대한민국의 주권이 미치는 영역임을 천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과 북한과의 관계가 적대적 관계에서 화해와 협력의 관계로 진일보해 온 면이 있기는 하나”, “북한의 대남적화통일노선이 본질적으로 변경된 바는 없다고 보인다”며 “한반도의 이념적 대립 상황”에 대한 책임을 ‘북한’에 떠넘기고 있다. 그러나 안창호, 조용호 재판관의 보충의견에서도 확인되듯 “자유민주주의 체제로의 통일”을 고집하는 것은 대한민국이다.
자유민주주의의 실천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강제 해산 결정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기 위한 사상적 실천이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옹호하고 추구하는 체제가 아니다. 제헌헌법의 ‘민주적 기본질서’에 ‘자유’를 덧붙인 것은 놀랍게도 72년 유신헌법이다. 7.4남북공동성명 이후 대한민국의 헌법 전문과 4조 통일 조항에는 ‘자유’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헌법에는 주체사상이 명시되었다. ‘자유’가 열린 이후, 국제법학자회가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정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후보 시절 인혁당 재건위 사건 재심 무죄 판결을 언급하며 “두 개의 판결”이 있으니 “앞으로 역사적 판단에 맡겨야 한다”고 했다. 국정원은 박근혜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열성적인 인터넷 댓글 활동을 조직적으로 벌였다. 당선된 대통령은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 간의 정상회담 녹취록을 공개하면서 북방한계선 등 영토 문제를 거론하는 것으로 국정의 포문을 열었고, 국회의원이 포함된 회합의 녹취록을 제시하며 ‘내란음모’라는 새로운 충격을 국정원이 만들어냈다. 이 흐름을 이어받은 법무부가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당해산 심판을 신청한 것이 헌법재판소에 이르기 전까지 이루어진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는 실천이었다. 이 과정에서 ‘통합진보당해산국민운동본부’라는 이름 아래 집결한 수많은 단체들의 역할도 적지 않다.
87년 민주화 항쟁의 성과가 대통령 직선제 개헌으로 수렴되면서 민주주의를 향한 투쟁은 자유주의에 포획 당해왔다. 87년 개정 헌법에 의해 출범한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은 지금 한국사회에서 민주주의를 향한 실천을 검토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헌법재판소의 헌법 해석은 ‘자유민주주의’에 “사유재산제와 자유시장경제질서의 수호라는 헌법적 실체”를 안겨준다.(한상희, "통치술로서의 정치의 사법화: 통합진보당사건과 관련하여", 민주법학 제56호) 헌법재판소는 신중하지 않게 정당해산심판을 한 것이 아니라 주도면밀하게 정당해산심판을 했다. 헌법재판소의 ‘진정한 목적과 활동’에 맞서기 위해서는 헌법재판소 비판을 넘어서야 한다.
헌법재판소 비판을 넘어서
자유주의가 자유시장경제를 추구하는 사상이자 이데올로기라는 점을 기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미국 연방제도 준비이사회 의장이었던 앨런 그린스펀조차 “우리의 경험상 전에는 없었던 일”이라며 사실상 틀렸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신자유주의의 위기 국면이 이어지고 있다. 김기춘 비서실장은 박근혜 정부의 ‘경제혁신3개년계획’이 구현될 수 있도록 ‘파부침주’의 자세로 ‘개혁의 선봉장’이 되자고 새해 각오를 밝혔다. 그는 “사람들이 우리의 모습을 보고 진정한 개혁으로 가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는데, 경제위기 극복의 성과가 가시화되기 어려운 조건에서 이데올로기 투쟁이 더욱 중요해질 것이라는 점을 간파했기 때문은 아닐까. 광범위한 이데올로기 교육을 위해 『반대세의 비밀, 그 은밀한 실체』와 같은 책을 출간한 것도 비슷한 이유일 것이다. “국정원이 실체적 작성자”라고 검찰이 밝힌 이 책은 ‘진보세력’을 ‘반대한민국세력(반대세)’으로 규정하며 설명하는 자료다. “대한민국 정부를 무리하게 비판하는 세력”에 맞서기 위한 자유주의의 실천은 전방위적이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맞서는 실천은 자유주의의 토대에서는 불가능하다. “단순히 옳고 그름이나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와 본질에 관한 문제”라는 결정문의 보충의견 마지막 문장은 중요한 통찰을 담고 있다. 다른 인권이 그렇듯 사상은 존재와 본질의 문제다. 그래서 사상의 자유는 인간의 존엄을 위해 요청되는 인권이다. 헌법재판소는 존재와 본질을 걸고 사상투쟁을 했고 “정치(경제)권력의 구조적 불평등사회”를 넘어서기 위해 “현행 자유민주주의 체제와는 다른 체제를 구상”하는 정치적 결사가 불가능하도록 만들었다. 사회주의는 ‘북한식 사회주의’가 있는 한 불가능한 사상이 됐다. 지금 문제는 다원성이 아니다. 우리가 만들어야 할 것은 사상의 자유 시장이 아니라, 사상을 공유하고 토론하고 실천하기 위해 관계를 조직할 권리다.
긴 호흡을 가다듬을 때
헌법재판소는 말한다. “이제는 우리 사회의 민주화가 상당히 진전됨에 따라 민주주의 이념에 입각한 사회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 아니다. 민주주의를 자유주의에 맡겨서는 안 된다. 자유를 자유주의에 내줘서는 더더욱 안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대응 과제가 자유주의 비판에 있는 것은 아니다. 자유주의의 ‘주도세력’이 이미 하고 있듯이, 경제적 질서까지를 포함해 체제의 변혁을 꾀하는 실천이 이어져야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를 향한 실천이기도 하다. 불평등과 빈곤의 심화를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우리의 미래에 자유시장경제를 가정해야 할 이유는 없다. 역사와 현실의 사회주의 체제에 인권침해 현상이 있다고 해서 체제나 사상을 근본적으로 부정할 이유도 되지 않는다. 자본주의 체제가 그렇듯 우리는 여전히 역사 속에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매카시즘과 같은 광풍이 한국에서도 재현될 가능성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다. 남한은 언제나 ‘공안정국’이었고, 체제에 저항하는 운동의 힘은 전세계적으로 약해졌기 때문이다. 말하지 못하게, 들리지 않게, 모이지 못하게 할 힘을 갖춘 자유민주주의체제의 ‘주도세력’이 가진 조직에 비해 우리의 힘은 조직되어있지 않다. 어떻게 체제에 맞서는 힘을 조직할 것인가. 어려운 숙제다. 대한민국이 만들어낸 ‘북한’의 존재와 본질을 우회할 수 없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숙제를 서두르지 않으면 저들이 우리의 남은 힘을 압살할 것이고, 서두르기만 하면 우리가 스스로 남은 힘을 방전해버리고 말 것이다. 87년 이후로, 적어도 97년 이후 자유민주주의체제의 ‘주도세력’은 조직되어온 반면 체제를 변혁하고자 하는 세력은 해산되어왔다는 점을 기억하며, 긴 호흡으로 주도면밀한 실천을 준비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