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소리
나에게 양심수의 이미지는 비전향 장기수다. 권운상의 <녹슬은 해방구>을 읽고 그들에 대한 존경이 어찌나 깊어졌던지. 특히 기억나는 일화는 사탕 반쪽을 나눠먹는 과정이었다. 사탕 한 알도 혼자 먹을 수 없었던, 생활 하나하나에 성찰과 논의를 거치는 모습을 보며 당시의 엄혹한 현실과, 그들의 진지함, 절실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이 전향서를 거부할 수 있었던 건 저런 생활들이 쌓여서겠지 싶었다.
정록
감옥에서 병역거부자는 병역기피자와 여호와의 증인 둘 중 하나로 구분됐다. 여호와의 증인이 아닌 소위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를 만나기도 어려웠을 때니 더 그랬던 것 같다. 스스로도 병역기피자와 구분해서 나를 설명하는 것도 쉽지 않았을 때, 내 앞으로 민가협 소식지가 배달됐다. 민주화 운동의 경험 때문인지 감옥에도 '양심수' 개념은 살아있었는데 민가협 소식지가 나름 그 가늠자였던 것 같다. 그 이후에는 사람들이 보기에 병역거부자는 뭔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대충 양심수로 구분됐다.
미류
1997년 인권영화제 개최와 관련해 당시 인권운동사랑방 대표 서준식이 전격 체포되었다. 그때 인권하루소식 기사 제목이 이랬다. "양심수는 있다" 민주화항쟁 10년이 흐른 당시에도 양심수는 있었고, 다시 20년이 흘러 대통령을 끌어내린 지금도 양심수는 있다. 내일은? 숙제가 무겁다.
디요
나에게 양심수는 참 가깝고도 먼 사람들이다. 선배 활동가들이나 병역거부를 한 친구들을 생각하면 양심수는 가까이 있지만, 알게 모르게 여전히 감옥에 있는 양심수를 생각하면 가까이 있는 문제로 생각하기 어렵기도 하다. 이 간극을 좁혀나가는 일이 나의 숙제이기도 하지만, 양심수 문제의 숙제 중 하나가 아닐까.
ㅁ
양심수 없는 나라를 바라며 광복절을 앞두고 8.15 특별사면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양심수 명단을 보며 예상보다 많은 숫자에 놀랐다. 이미 형량을 채워 만기 출소했거나 곧 출소를 앞두고 있는 이들도 많았다. 현재 광화문 세종로 한켠에서는 양심수 석방을 촉구하는 엽서 보내기 캠페인이 진행되고 있다. 그 옆에 양심수들이 갇혀있는 0.75평 감옥을 재현한 공간이 있다. 좁디좁은 그곳에서 잠시나마 쉬이 잊고 있던 양심수들을 떠올려봤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무게가 더는 쌓이지 않길, 양심수들이 하루 빨리 일상으로 돌아오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