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는 한국 정부의 외국인 정책 이행보고서를 심사하면서 ‘순수 혈통’이라는 개념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보고서는 “한국의 현실을 볼 때 이미 한국은 단일민족이 아니므로, 현재 한국사회의 다민족적 성격을 인정하고, 단일민족이라는 한국의 이미지를 극복할 수 있도록 교육, 문화, 정보 분야에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했다. 또 한국 보고서 담당 특별보고관인 안와르 케말 위원 등은 “순수 혈통 개념은 다른 사람이 불순한 혈통을 가졌다는 뜻을 내포한다”며 “인종 우월성 관념을 담고 있다”고 지적했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한국 사회에서는 단일민족과 순혈주의 등과 같은 폐쇄적 민족주의에 대한 논쟁이 촉발되었다.
북 매체에서 드러난 단일민족론
북 사회 역시 민족주의는 우려스러운 수준에 있다. 북의 <로동신문>은 지난 7월 9일자에서 ‘단일성은 조선민족의 자랑’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발표했다. 이 기사에서 <로동신문>은 “우리 민족은 반만년의 력사를 통하여 끊을래야 끊을 수 없이 하나로 이어진 단일민족이며 이 단일성이야말로 자주통일과 민족발전의 힘있는 무기”라며, “유구한 우리 민족의 단일성은 조선민족특유의 자랑”이자 “우리 민족처럼 반만년의 오랜 력사를 내려오면서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며 자기의 령토와 혈통을 지켜 단일민족으로 꿋꿋이 살아온 민족은 이 세상에 드물다”고 주장했다. 또 “그가 어디에서 살건, 과거 생활이 어떠하건 관계없이 조선민족의 피와 넋을 지난 사람이라면 민족의 자주권과 단일성을 되찾고 지켜나가기 위해 모든 것을 다바쳐 투쟁해야 한다”며 “이것은 누구도 회피할 수 없는 신성한 민족적의무”라고까지 주장했다.
그동안 북 사회는 <로동신문>등과 같은 공식 매체를 통해 ‘단일민족’, ‘민족의 단일성’ 등을 강조해왔다. 50년 이상 미국과 실질적인 군사 대치 상태를 유지해오며 북은 사회 내부적인 통치 원리로서 민족주의를 강조해온 것이다. ‘하나의 민족’으로서의 남북 민중이 미국이라는 ‘외세·제국주의’에 함께 맞서야 한다는 것이 주된 논리였다. 북은 실제로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으로부터 실질적인 군사적·경제적 위협을 받아왔고, 역사적으로 중·소분쟁을 비롯해 국제 사회주의 국가들 사이에 분쟁과 모순이 일어나면서 ‘독자노선’을 걷는 가운데 대내외적으로 민족주의를 강조해왔다. 어떠한 집단이든지간에 ‘외부의 적’에 맞서 ‘내부의 단결’을 모색하는 것은 어찌 보면 일반적인 일로 여겨진다. 하지만 내부의 단결을 꾀하는 과정에서 북은 민족주의 담론을 적극적으로 이용했고, 북의 민족주의는 유럽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발생한 부르주아 민족주의가 아니라 제국주의에 맞서는 식민지 상황에서 발생한 ‘진정한 민족주의’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여전히 북의 민족주의 개념은 ‘피줄’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고, ‘전민족의 이익’이라는 이름 앞에 자본과 노동이라는 계급의 문제는 부차화하고 만다.
2007년 북에서 나온 <철학연구> 1호에서 발표된 ‘민족주의에 대한 리해에서 제기되는 몇가지 문제’ 글을 보면, “민족은 력사적으로 형성되고 발전하여온 사람들의 공고한 집단이며 사회생활의 기본단위이다. 즉 민족은 피줄과 언어, 지역의 공통성, 문화생활의 공통성으로 특징지어지는 사람들의 공고한 집단”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민족의 개념 속에서 “조선민족제일주의”와 “김일성민족”과 같은 배타적인 민족 개념이 등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논리적 귀결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민족의 자주성과 민족성을 옹호고수하고 민족의 륭성번영을 이룩하는데 대해서는 계급, 계층의 리해관계를 초월하여 민족성원 모두가 공통된 리해관계를 가진다”며 “민족의 운명속에 매 개인의 운명이 있”다고까지 주장한다. “(식민지예속국가들의) 공산주의자들이 조국해방과 애국주의의 기치를 드는 것은 곧 종주국의 부르죠아지들을 반대하는 것”이라며, ‘종주국의 부르죠아지들’을 반대하기 위해서는 식민지의 부르죠아지들과 공통의 이해관계를 가져야 한다고,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노동계급에게 강요하고 있다.
《다민족, 다인종사회》론은 남조선을 ‘잡탕화’하려는 민족말살론?
게다가 2006년 4월 27일자 <로동신문>에는 ‘《다민족, 다인종사회》론은 민족말살론’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려 있다. <로동신문>은 이 기사에서 “최근 남조선에서 우리 민족의 본질적 특성을 거세하고 《다민족, 다인종사회》화를 추구하는 괴이한 놀음이 벌어지고 있다”며, 남측 사회에서 지금까지 ‘단군의 후손’, ‘한핏줄’, ‘한겨레’ 등을 강조하여온 초·중·고 교과서에서 2009년부터는 ‘다인종, 다민족 문화’와 관련된 내용을 포함시키며 ‘국제결혼가정’, ‘외국인근로자 가정’ 등의 용어도 ‘다문화 가정’으로 바꾸기로 했다는 사실을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남측 사회의 흐름에 대해 <로동신문>은 “남조선의 친미사대매국세력이 운운하는 《다민족, 다인종사회》론은 민족의 단일성을 부정하고 남조선을 이민족화, 잡탕화, 미국화하려는 용납 못할 민족말살론”이라고 주장했다. 나아가 “《다민족, 다인종사회》론을 제창해나서는 남조선의 친미매국세력은 민족관과 사회력사발전에 대한 초보적인 리해조차 없는 것은 물론 한쪼박의 민족의 넋도 없는 얼간망둥이들”이라며 “남조선에서…반민족론이 제창되는 것은 명백히 북과 남을 혈통이 서로 다른 지대로 만들고 6.15 통일시대를 가로막으며 민족을 영구분렬시키려는 《한나라당》을 비롯한 친미족속들의 범죄적인 기도와 미국의 배후조종의 결과”라고 분석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따른 전세계적인 이주노동의 증가와 신자유주의의 정점에 미국 자본이 다수 있다는 사실로만 단순히 따져본다면, 남측 사회의 이주노동의 증가와 그에 따른 ‘다문화 가정’의 증가, ‘다민족 문화’에 대한 관심의 확대와 미국과의 연관성을 어느 정도 설명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민족·다인종사회론이 한 사회를 “이민족화, 잡탕화”하려는 “민족말살론”이라는 주장에 이르러서는 말문이 막혀버린다. 게다가 “혈통”과 다민족·다인종사회론을 제창하는 것이 “친미족속들의 범죄적인 기도와 미국의 배후조종의 결과”라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허탈한 심정까지 느껴진다. 북이 이해하는 “사회력사발전”에 대한 이해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한 이주노동의 증가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그리고 고스란히 그러한 현상의 피해자가 되고 있는 전세계의 가난한 이주노동자들은 어떻게 이해되고 있을 것인지도 자못 궁금하다.
이남 ‘진보’진영에게서 보이는 민족주의적 관점의 해악에 대하여
폐쇄적인 민족주의의 ‘해악’에 대한 우려는 북 사회를 향해 있는 것만은 아니다. 심지어 이남 사회의 ‘진보’진영에서도 매우 우려스러운 민족주의의 ‘해악’들이 보이고 있다. 범민련 남측본부는 기관지 <민족의 진로> 3월호에서 ‘실용주의의 해악에 대하여’라는 글을 발표, “외국인노동자문제, 국제결혼, …동성애와 트랜스젠더” 등의 “문제들”이 “90년대를 기점으로 우리 사회에 신자유주의 개방화, 세계의 일체화 구호가 밀고 들어오던 시점부터 이러한 문제들이 사회문제로 대두되었음을 알 수 있”다며 “결국은 이남사회가 민족성을 견지하지 못하고 민족문화전통을 홀대하며, 자주적이고 민주적이지 못한 상태에서 외래적으로 침습해오고 그것이 또한 확대 재생산되는 구조 속에서 이 문제들이 점차 심각해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서울경기인천 이주노동자노동조합(아래 이주노조)은 강하게 반발했다. 이주노조는 성명을 발표해 “(‘실용주의의 해악에 대하여’라는 글의 논리는) 외국에서 노동 이주를 해온 이주노동자들, 결혼 이민을 온 이주자들은 한국의 ‘민족성’과 나아가 ‘혈통’을 어지럽히는 존재가 된다”며 “폐쇄적 국수주의로 비춰질 위험이 있는 사상은 오히려 ‘해악’”이라고 비판했다. 또 “(‘실용주의…’의) 관점은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다”며, “현재 한국에는 40만명의 이주노동자를 비롯해 90만에 육박하는 외국인 체류자들이 있”고 “현재의 추세만 지속이 되도 20년 뒤엔 이민 2세가 거의 150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고 밝혔다.
‘세계화’나 ‘국제화’를 신자유주의적인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무비판적으로 무조건 추구해야 할 목표로 보는 것도 문제지만, 그에 대한 반편향으로서 ‘세계화’나 ‘국제화’ 그 자체를 총체적으로 무조건 거부하는 것은 자칫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구조적인 극복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 또다른 문제를 낳을 수 있다. 또 국제연대나 국제주의는 전통적으로 억압받는 민중들의 사상이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민족주의의 틀에 갇혀 단일민족의식이 오히려 이주노동자들을 억압하거나 외국인이나 다른 문화를 무조건 배제하는 결과를 낳는다면 그 역시 편협한 폭력을 낳을 뿐이다. ‘단일민족’을 강조하며 민족주의의 틀 안에서 또다른 사회적 소수자들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전세계적인 신자유주의와 제국주의에 맞서 누구와 어떻게 연대할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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