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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으로 읽는 세상

복지는 숫자 놀음이 아니라, 존엄한 삶에 대한 인간의 권리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진정한 복지가 불가능한 이유

지난 8월 8일 정부는 세법개정안을 발표했다. 근로소득세가 주 개정대상이었다. 소득공제 중심의 세금감면 체계를 세액공제로 바꿔서, 연봉 3,450만 원 이상 노동자들의 소득세 부담을 늘리고 늘어난 세수는 근로장려세제와 자녀장려세제와 같은 저소득층 지원에 주로 사용하겠다는 게 골자다. 이에 당장 세금부담이 늘어나게 된 노동자들의 반발이 거셌고, 이전과는 달리 박근혜 대통령은 나흘 만에 재빠르게 원점 재검토를 지시했다. 결국 정부는 연봉 5,500만 원 이상 노동자들의 소득세 부담을 늘리는 수정안을 발표했다. 한편 8월 14일에는 보건복지부가 2014년도 최저생계비를 발표했다. 건강한 부부와 자녀 2명으로 이루어진 중소도시 전세세입자 4인 가구의 최저생계비를 163만 원으로 발표한 것이다. 그 동안 최저생계비 인상률을 총 4번 측정하고서 이번 인상률이 역대 3번째로 높다는 말장난까지 곁들여서 말이다.

증세와 최저생계비 논란은 지금 한국 사회에서 ‘복지’를 둘러싼 담론과 실천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노동자, 자영업자들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불확실성 속에 일터에서는 생존게임을, 사적연금, 보험, 가족을 통한 ‘사적 복지’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국가가 제공한 사회적 안전망이나 복지혜택이 전무하다시피 한 상황에서 중하위 노동계층까지 확대된 증세는 즉각적인 반발을 불러왔다. 이에 대해 몇몇 복지전문가들은 비이성적인 반발보다는 우리도 보편복지를 위해서 증세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견들을 내놓고 있다. 과연 비이성적인 걸까? 적어도 현재 노동시장과 복지 현실에서 개인으로서는 매우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반응이다. 자본주의 경제, 신자유주의의 경쟁 속에서 온갖 모욕을 감내해내며 언제 끊길지 모르는 노동소득(임금)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사람들이 정부정책의 지속성을 신뢰할 근거가 별로 없다. 언제나 정부는 재원 타령을 했고, 당장 경기도에서는 부동산 취등록세 감소로 무상급식을 중단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금융자본의 연금과 보험이 당장 더 신뢰가 간다. 이번 세법개정안에서도 경제성장률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법인세, 기업 세금감면 혜택은 거의 손대지 않았다.


한편 신사숙녀복은 10년 동안, 내의는 3년 동안 입으라는 최저생계비에 대해서 저소득 당사자들의 모욕감과 분노는 잘 보이지 않는다. 노동시장에서 밀려나 기초생활보장법의 보호를 받고 있던 저소득층은 사회적 짐이 되고 있다는 공격에 시달린 지 오래다. 인간으로서 존엄과 행복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생계비를 요구하면, 다들 존엄이고 자존감이고 다 팽개치면서 그렇게 힘들게 돈 벌고 있다는 반박이 금세 날아온다. 일도 하지 않으면서 그 정도 지원을 받는 것을 고맙게 생각하라고 한다. 그래서 최저생계비 또는 저소득층의 어려운 상황이 언론에 나오는 것은 보통 사람들이 상상하기 어려웠던 전기나 수도가 끊기는, 극단적인 사례일 때다.

흔히 복지는 인간의 존엄한 삶을 보장하기 위한 국가와 사회의 책임으로 제시되곤 한다. 그리고 존엄한 삶을 위해 물질적 재화가 반드시 필요하고 이를 위한 재원조달이 언제나 복지담론에서는 관건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행복하고 존엄한 삶을 위해, 노동에 뛰어들고 있다. 복지 이전에 존엄한 삶을 위한 물질적 재화의 생산과 획득은 이미 노동을 통해서 각자의 자리에 존엄을 배분하면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소수는 높은 지위에 올라 풍족한 재화와 사회적 명성을 얻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다수는 노동과 존엄을 거래해 돈을 벌고 일터 바깥에서의 존엄을 지켜낸다. 노동시장에서 밀려난 저소득층은 생존을 위해 복지와 존엄을 거래한다. 복지가 존엄한 삶을 위한 재화의 문제라면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노동을 비켜갈 수 없다.

그런데 한국 복지담론의 특징은 자본주의 경제 질서, 구체적으로는 신자유주의적 시장질서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껏해야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놓은 사회적 문제들을 복지를 통해서 해결해가자는 이야기 정도다. 언제나 복지에서 경제는 주어진 것일 뿐, 복지가 개입해서 바꾸어낼 무엇은 아니다. 심지어 어떤 이는 신자유주의적 금융자본에 대한 중과세를 주요한 복지재원으로 이야기하기도 한다. 재원마련을 위해서라도 금융세계화가 촉진되어야 할 지경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복지 자체가 잔여적이다. 어떤 면에서는 기생적이기도 하다. 그렇게 자본주의 경제 질서를 고스란히 인정하고, 일차적인 재화의 분배를 받아들인 다음, 여유 있는 사람이 좀 더 내서 없는 사람 돕자는 복지 담론은 누가 얼마를 낼 것인가, 재원마련을 위해서 어떤 정책이 필요한가, 없는 사람의 기준을 어디로 할 것인가 등을 마련하는데 몰두하게 된다. 단 현재의 인구추세, 경기가 유지된다는 가정 아래서.

복지가 인간의 행복하고 존엄한 삶을 위한 권리라면 더욱 그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노동과 존엄을 거래해야 하는 자본주의부터 바꿔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끊임없이 재화와 존엄을 거래하도록 한다. 모욕을 참으면서 일하든지, 아니면 복지를 구걸하든지. 복잡한 숫자 놀음이나 장밋빛 미래를 섣불리 말하기 전에, 바로 지금부터 존엄하고 행복한 삶을 위해서 긴 싸움을 시작해야 한다. 그래서 그 누구도 재화와 존엄을 거래 하지 않는, 재화 그 자체에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사회가 필요하다. 그런 사회에서 복지'정책'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