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에서 열리는 국제영화제에 공식적인 활동으로는 처음 참석해 본 탓인지, 암스텔담 페스티발이 갖고 있는 그 외면적 거대함 때문인지, 적잖이 긴장을 한 상태에서 암스텔담에 발을 내딛었습니다. 어두컴컴한 밤, 도심 곳곳을 유유히 흐르는 운하와 운치를 더해주는 길거리의 조명들, 여남노소 할것없이 자전거를 타고 다녀 더없이 편안하고 자유로워 보이는 모습들. 나름대로 감상에 젖어 암스텔담에서 첫날을 보냈지만, 영화제가 본격적으로 시작하자, 춥고 우중충하기 그지 없는 암스텔담 날씨를 감내하며 이리저리 상영관들을 쫓아다녀야 했어요.
암스텔담 다큐멘터리 페스티발의 올해의 주제는 ‘사유를 위한 영화’(Films for thought)입니다. 이 주제를 접한 순간 들었던 생각은 ?언제 영화가 사유를 던지지 않았던 적이 있었는가? 였어요. 영화제 주최 측은 좀더 개인적이고, 시적이고, 인간적인 다큐멘터리의 등장을 놓고 이러한 표현을 쓴 것이라고 해요. 만약, ?인권영화를 행동을 위한 영화의 하나로 규정한다면 사유를 위한 영화는 아닌 셈이 되나?, 사유를 위한 영화와 행동을 위한 영화를 딱 잘라 구분지을 수 있을까?? 평소의 의문들이 다시 꼬리를 물었습니다.
일각에서는 정치적, 사회적 이슈를 중심적으로 부각시키는 다큐멘터리들을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며, 영화의 정체성(영상 언어로 사람들과 소통한다)을 지니지 않은 것으로 취급하려는 시각이 있는 듯 해요. 행동을 촉구하는 다큐멘터리라면 사유를 필요로 하는 건 응당 당연할 텐데... 물론 전세계 각국에서 다양한 스타일로 만들어진 다큐멘터리들을 접하면서 똑같은 인권사안을 가지고도 다른 깊이와 울림을 줄 수 있다는 바를 확인해, 영화가 가지는 풍부함을 다시금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암스텔담 다큐멘터리가 내건 표어에서 좀더 개인적 차원의 주제에 천착한 다큐멘터리들을 영화적으로 더 우수한 것인듯 평가하는 분위기가 감지되면서, 과연 그러한 지형도에서 ‘인권영화는 어디쯤 위치하고 있을까’하는 풀리지 않는 물음이 떠올라 머리가 복잡해진 건 사실이에요.
암스텔담 다큐멘터리 페스티발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다큐멘터리'라는 영화적 장르에 해당하는 작품을 상영하는 영화제이지, 주제적인 측면에서 진보성을 담보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화씨 9/11>이나 <송환>등을 떠올려 보시면 쉽게 알 수 있듯, 삶의 진실에 다가가려는 다큐멘터리의 자세는 인권영화와 숱한 교집합을 이루는 중요한 부분 같아요. 올해 암스텔담 페스티발에서도 수백편의 상영작 중 수십편의 인권영화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빈곤이 더 이상 낯설지 않은 필리핀 한켠. 만나지 말아야 세상의 밑을 너무 빨리 접해, 아무도 관심을 기울여주지 않는 길거리에서 소박한 꿈마저도 빼앗긴 채 하루하루를 보내는 소년들의 모습을 인상적으로 담은 영화 <분소>, WTO를 비판적으로 규정하는 사이트를 만든 것을 계기로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WTO가 유포하는 가치를 희화화시켜, 웃음을 끊이지 않게 만드는 두 조커의 행보를 쫓은 영화 <더 예스맨>, 유럽 등지로 수출할 목적으로 아프리카의 탄자니아 지역에서 발전되고 있는 '수산업'의 본질을 추적하며, 아프리카와 유럽의 군사적, 정치적 관계의 실체를, 아프리카의 암울한 현실과 더불어 박진감 넘치게 각인시키는 <다윈의 악몽>등이 그 예입니다.
보이지 않는 벽에 가려 좀처럼 알기 어려운 세계 곳곳의 인권 문제를 접할 수 있도록 해주고 또다른 행동의 방식을 고민하게 만들어주는 인권영화의 역할이 역시 유효하다는 걸 스스로 다시금 체감한 자리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