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ㅅ
정희진 선생의 최근 글들이 저를 휘젓고 있습니다. 그의 "위로하는 몸"이란 글을 읽고, 속으로 맥빠진 항변 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요, 난 이렇게 살아왔습니다. 이제와서 어쩔 수 있을까요. 그러다 인권오름에 실린 한낱 선생의 글을 읽고, 그와 나의 차이에 대해 가만히 생각합니다.
상실의 두려움 앞에 선 모든 분들께, 한겨레 신문에 실린 정희진 선생의 "울지 말아요, 나 여기 있어요"라는 글, 대신 전합니다.
미류
어릴 때 외삼촌이 돌아가셨다. 어른들은,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바다에 빠졌다고 나에게 설명해주었다. 울음을 그치지 못하는 외할머니 옆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던 나는, "헤엄쳐서 나올지도 몰라요. 할머니, 이제 그만 울어요."라는 말을 겨우 건넸다. 그 이후로 나는 누군가를 위로한다는 것이 어떤 것일지 두고두고 고민했던 것 같다. 위로는 마음만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닌 듯도 하다. '위로하는 몸'으로 움직여야 할 마음과 생각들이 어떤 것일지, 다시 묻는다.
정록
위로는 누군가가 떠나거나 어떤 사건에 대한 게 아닌, 결국 남아있는 자들이 서로 잘 살아보자고 내미는 손길
ㅁ
시작은 일방향이었다 해도 끝은 쌍방향으로 남게 되는 것. 제 위로, 위안의 기억은 그런 것 같아요.
돌진
"그래도 결국엔 누구나 혼자 감당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는 말. 어찌 들으면 위로 같지 않은 이 말이 큰 힘이 되곤 했다. 그래, 누구나 혼자 감당할 수밖에 없는 부분들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 거겠지. 나 혼자만이 아니라는 데서 오는 고통의 보편성이랄까, '누구나'에서 오는 동질성에 기반한 연대감이랄까, 어쨌든 나름 위안이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언젠가 내게 힘을 줬던 음악. 에피톤프로젝트의 ‘믿을게’, ‘You raise me u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