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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으로 읽는 세상

혐오세력이 잡아먹은 것들

당신이 말하라, 평등을 원한다고

'문화다양성'이 봉변을 당했다. 6월 부천시의회에서 벌어진 일이다. '부천시 문화다양성의 보호와 증진에 관한 조례' 제정안은 본회의 의결 절차를 남겨두고 있었다. 본회의 몇일 전 갑자기 반대 세력이 들고 일어났다. "동성애와 무슬림 수용의 문을 활짝 열어주는" 조례라는 이유였다.

조례 제정을 추진했던 의원들은 이렇게 말해야 했다. "동성애자와 무슬림은 이미 우리 곁에 함께 살고 있습니다. 적대를 선동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주장이 오히려 문화다양성 조례의 필요성을 알려줍니다." 그러나 이런 말은 들리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조례안을 자진 철회했다. 혐오선동세력은 또 하나의 먹이를 얻었다.

문제의 진단

휴대폰으로 쏟아지는 문자폭탄, 격앙된 목소리로 적대를 선동하는 발언자들, 교회 신도 수를 과시하며 압박하는 목사들.... 움츠러들게 되는 건 이해 못할 바 아니다. 대화를 하고 설득을 해보려는 의원들도 없지 않다. 그러나 혐오선동세력이 원하는 것은 토론이 아니다. 그들은 굴복을 원할 뿐이다.

10여 년 동안 벌어진 일이다. 혐오선동세력은 2007년 차별금지법 반대를 조직하면서 사회적으로 등장했다. 그 후 학생인권조례, 국가인권위원회, 인권교육 등 '인권'을 잡아먹었다. 최근에는 '성평등'과 '젠더'가 들어간 각종 법안과 조례들이 먹잇감이 되었다. 올해 3월 울산에서는 '학교민주시민교육조례'까지 이들의 표적이 되었다 하니 끝을 짐작할 수가 없다.

반대 의견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철회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가깝게는 '유치원3법' 입법예고 게시판에 1만 건 넘는 반대 의견이 달렸다. 그러나 철회하지 않고 사회적 논의를 이어간 덕분에 변화의 가능성을 만들 수 있었다. 기득권, 다수, 주류에 맞서 인권을 옹호하기 위한 법안은 반대를 피하기 어려운 운명에 있다. 반대 의견은 물러설 이유보다 더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할 이유를 확인시켜준다.

잘 만들기 위해 숨을 고르거나 잠시 물러설 수도 있다. 그런데 혐오선동세력이 반대하는 법이나 조례에 대해서는 아예 등을 돌린다. 재상정 하겠다는 말은 사라지고 재검토하겠다는 말이 많아졌다. 의원들은 철회를 부끄러워하는 대신 '인권'과 '성평등'을 부끄러워하게 됐다.

이런 일들이 반복될 때마다 혐오선동세력의 전광판에는 승리의 기록이 새겨진다. '양성평등'은 되지만 '성평등'은 안된다는 주장을 보자. 그들은 '양성평등은 남녀 차별 없애자는 것인데 성평등은 성소수자 포함하는 것이라 안된다'는 논리를 편다. 성소수자에 대한 적대와 함께 평등에 대한 왜곡된 이해를 조장한다. 그런데 의회가 '성평등'을 포기하면 혐오선동세력은 그것을 자신들이 옳았다는 증거로 삼는다.

의회가 '말도 안되는 말'을 '말이 되는 말'로 만들어주니 사회는 혐오에 학습 당한다. 말은 저절로 칼이 되지 않는다. 의회가 말을 칼로 만들어주고 있다. 그 칼에 소수자들은 찔리고 민주주의는 동강난다. 혐오선동세력의 반대는 수렴되어야 할 의견이 아니라 정면돌파 해야 할 혐오일 뿐이다. 돌파해야 토론이 시작될 수 있다.

그릇된 전략

인권과 평등을 위한 법이나 조례가 '아직' 제정되지 못한 상황이 문제가 아니다. 의회가 이런 제도들을 '갈수록' 제정되기 어려운 상황으로 몰아넣는 것이 문제다. 문제를 정확히 진단하지 않으니 그릇된 전략이 만들어진다. 그 중 하나가 논란을 피해 '일단' 제정하자는 생각이다.

원조는 역시 2007년의 차별금지법안이다. 정부는 "차별금지법(안)이 폐기될 우려"가 있으니 "차별금지사유를 합리적인 기준에 따라 조정함으로써 '성적 지향'이 특별히 부각되어 논란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조정"하기로 했다. 7개의 차별금지사유를 골라내 삭제하는 법안이 탄생했다. '차별해도 된다'고 말하는 차별금지법안을 '입법 기술적 문제'라며 지지해달라고 했다. 경남 학생인권조례가 딱 그 꼴이었다. 도의회는 논란을 우려하여 교육청 발의안을 손질했다. '성인권교육'을 '성인지교육'으로 수정하고 '성평등'이라는 말은 삭제했다. 제정하기 위해 수정한다더니 본회의에 상정조차 안했고 결국 자동폐기 됐다.

"논란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일부 차별금지사유를 삭제한 전략은 오히려 논란에 생명력을 부여했다. 차별금지법안이 폐기될 우려는 차별금지 원칙의 폐기를 정당화했고 결과적으로 법안마저 폐기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런데도 논란이 되는 것은 피하고 보자는 흐름은 반성 없이 이어지고 있다.

2007년의 경험 이후 얻어야 할 교훈은, '성적 지향' 뺀다고 혐오선동세력이 가만히 있지 않는다는 점이어야 했다. 승산이 있음을 알아버린 이들은 자신들이 반대하고 싶은 것은 어떤 식으로든 동성애와 연결시킨다. 20대 국회에서 철회된 국가인권위원회법 개정안은 모두 8개다. 성희롱 대응 강화, 인권교육 내용 구체화, 여성인권 보장을 위한 소위원회 설치, 권고 이행력 강화 등 내용은 각양각색이다. 반대 의견만 한결같다. 기업인권 업무를 강화하자고 하면 친동성애 기업을 지원할 것이라며 반대한다.

'일단' 제정하자는 시도는 10여 년 동안 확인되었듯 성공할 리도 없거니와 성공 자체가 실패인 시도다. 차별금지 원칙을 저버린 차별금지법에 차별을 예방하고 금지하는 기능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테니 말이다. 법이나 조례는 궁극의 목표가 아니다. 평등과 인권의 원칙이 작동하는 사회로 변화를 일구는 것이 목표다. 원칙을 저버리거나 숨겨서 일단 제정하자는 생각은 접어야 한다.

나중에 하자?

서두르기보다 때를 기다리자. 이렇게, '침묵'이라는 그릇된 두 번째 전략이 등장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19대 국회의원 시절, 차별금지법안 공동발의 의원들 대부분이 철회를 요구할 때 철회에 동참하지 않은 소수 중 한 사람이었다. 언젠가 제정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거짓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마음이 아니라 행동이다. 현 정부와 여당은 안한다고도 안하지만 한다고도 안한다. 논란이 될수록 혐오선동세력에 유리하니 빌미를 주지 말자는 생각이다. 빌미를 주지 않으려 한들 혐오선동세력이 꼬투리 잡기를 멈추지도 않겠거니와 조건을 더욱 악화시킨다는 점에서 잘못된 판단이다.

남부빈곤법센터(SPLC, 미국)는 <혐오에 맞서 싸우기 위한 열 가지 방법> 중 하나로, 공공기관의 직위를 가진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라고 안내한다. 이들의 침묵이 만들어내는 진공상태가 혐오를 더욱 확산시키기 때문이다. 혐오를 선동하는 행위자들에게 침묵은 수용으로 해석될 뿐이다. 올해 더불어민주당이 서울 퀴어퍼레이드에 참여단을 모집하자 자유한국당은 비난하는 논평을 냈다. 그런데 더불어민주당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퀴어퍼레이드 참여를 부끄러운 일로 만들어버렸다.

자기 안의 혐오를 직시하고 스스로 교육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혐오는 역사적이고 구조적인 감정이며 습속이다. 자신은 혐오로부터 자유롭다는 착각이야말로 부끄러운 것이지 자신에게 깃든 혐오를 발견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래야 변화에 도전할 수 있다.

혐오선동세력이 약해지는 때는 저절로 오지 않는다. 21대 총선은 넘기고 보자는 말은 대선 때문에 부담스럽다는 말로 반복될 것이다. 의회나 정부나 지금은 어렵다는 말로 언제나 어려운 상황을 만들고 있다. 때를 보아 제정하자는 말 대신 때를 만들 계획을 내야 한다. 시끄럽게 만들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 아니다. 더욱 시끄럽게 만들어야 한다. 만들어져봤자 아무도 모르는 법이나 조례보다 힘겹더라도 논란을 거치며 사회적 의미를 얻는 제도가 힘을 가진다.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제정된 지역의 많은 인권조례들은 아무도 모르게 개악되었다.

혐오선동세력은 각종 법과 조례를 '유사 차별금지법'으로 몰아세우며 '차별금지법 반대'의 교집합을 확장시키고 있다. 어쩔 것인가. 차별을 막자는 취지가 아니라며 반대를 모면할 궁리만 해서는 안 된다. 차별금지법으로 소란을 일으켜 평등을 향한 변화를 이뤄야 한다.

당신이 말하라

3월 뉴질랜드에서 무슬림을 향한 증오범죄가 발생했을 때 저신다 아던 총리가 견지한 태도와 그의 발언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한국사회에는 그런 정치인이 없어 보인다. '난민'이 표적이 됐던 지난해, '난민 반대' 집회에 참석하는 국회의원은 있었지만 난민을 환대하자고 제안하고 설득하는 의원은 찾아볼 수 없었다. 배우도 있고 학자도 있고 예술가도 있었다.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시민들이 있었다. 감동할 준비가 되어 있는데 뉴질랜드 총리와 같은 감동을 주는 정치인은 없었다. 정치인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 하는 말이 아니다. 세상이 바뀌려는데 정치인들이 발목을 잡고 있어서 하는 말이다.

법이나 조례에 관한 의견을 전하려고 의원을 만나면 흔히 듣는 말이 있다. "밖에서 더 많이 말해주세요." 밖에서는 충분히 말하고 있다. 밖에서 누가 더 크게 많이 말하는지 조사하라고 의회를 둔 것도 아니다. 이제 당신이 말하라. 당신은 성소수자를 대신해, 무슬림을 대신해, 사회적 소수자를 대신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평등을 위해, 더 나은 사회를 위해 말해야 한다. 사회적 논의를 촉진하고 진전시키는 것은 당신의 과제다. 당신이 말하라, 평등을 원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