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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으로 읽는 세상

대북 삐라, 무엇을 위한 누구의 권리인가?

대북 전단 살포로 평화권을 위협하는 이들에게

삐라, 어렸을 적 들었던 단어를 최근 많이 듣는다. 반북 단체에서 북한에 삐라(대북 전단)을 보내면서 남북관계가 더욱 긴장되고 있어 이에 대한 찬반 의견이 분분하다. 심지어 10월 11일 연천에서 뿌린 대북 전단 풍선을 북한이 떨어뜨린다며 포격을 하면서 한반도 긴장은 높아졌다. 그러나 정부는 반북 단체들의 표현의 자유를 제재할 방법이 없다하고 대북 전단을 살포하는 단체들은 북한 주민의 알 권리를 위해 중단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10월 25일 대북 전단을 뿌리는 지역인 파주와 연천 주민들은 대북 전단 살포를 막았다. 그렇다면 이것은 반북 단체들의 주장처럼 휴전선 인근 주민의 인권과 북한 주민의 인권이 부딪치는 문제일까? 또는 접경지역 주민의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 권리’와 반북단체의 ‘표현의 자유’가 부딪치고 있는 것인가?

알 권리를 구성하는 주체와 방식을 떼놓고 얘기할 수 없어

숱한 비판에도 대북 전단을 뿌리고 있는 박상학 자유북한운동연합 대표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북한 동포들의 알 권리”라고 했다. 도대체 북한 주민의 알 권리란 무엇인가. 알 권리는 정부 등 권력기관이 사회구성원이 살아가면서 필요한 정보를 숨기거나 공개하지 않아 다른 권리를 향유하지 못하기에 만들어진 개념이다. 필요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권력이 막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알 권리는 ‘누가’, ‘어떻게’, ‘어떤 내용’을 전달할 것인가가 함께 고민되고 구성될 때 권리의 언어, 인권의 언어가 되는 것이다. 알고 싶지 않은 개인(자연인)의 사생활을 알 권리라 칭하면서 알려달라고 하지 않듯이 말이다. 권리의 구성 주체를 삭제한 채 차용한 권리는 인권의 언어가 아니다. 

그렇다면 반북 단체에서 북한에 알려주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연천에서 뿌린 전단에는 “아직도 밥 한 끼가 새로운데 잔디 깔고, 수영, 승마, 스키장하는 철없는 30살을 하루아침에 원수와 장군님으로 모시고 있다”는 내용, 김정은 비서의 부인인 리설주의 사생활을 원색적으로 표현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물론 원색적이지 않게 경제 등 남한 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하는 단체의 대북선전물도 있다. 이렇듯 알 권리를 구성하는 주체가 ‘북한 주민’이 아니라 ‘반북 단체’이며 내용도 방식도 북한 주민의 의사와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반북단체가 ‘알리고 싶어 하는 것’을 북한 주민의 알 권리라고 참칭하고 있다. 게다가 일부 탈북자들은 대북 전단에 대해 “이미 북한 사람들은 남한을 많이 알고 있다. 대북 전단을 보낸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고도 했다. ‘우리가 북한을 너무나 모르고 있기에’ 반북 단체가 이러한 일을 버젓이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문하게 된다. 


또한 북한 정부가 폐쇄적으로 국가를 운영하고 있다고 하지만 한국은 다르다고, 폐쇄적이지 않다고 확언할 수 있을까. 이미 다수의 외국 관광객이 북한을 방문하고 있지만 한국은 북한을 들어갈 수 조 차 없고 북한 관련 게시물을 홈페이지에 옮겨다 놓거나 SNS로 리트윗만 해도 국가보안법 등으로 제재 받거나 삭제되기 일쑤인 현실이다. 따라서 알 권리는 북한 주민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권리이다. 따라서 북한에 대한 아는 것도, 북한 주민과의 교류도 막고 있는 정부 정책에 대해 문제제기를 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한국 정부는 국가보안법 외에도 2010년 524조치(천안함 침몰에 대한 북한의 책임을 촉구한다며 단행)를 통해 남북 교류협력과 관련된 모든 인적 물적 교류를 잠정적으로 중단했다. 


모욕적으로 구성되는 권리

게다가 이들이 보내는 전단 꾸러미에는 1달러짜리 지폐와 라디오, 의약품, 여성 스타킹, 라이터 등 이 들어 있다. 이들 보수 단체들은 이것이 북한 주민들의 실생활에 도움을 줄 만한 생필품이라고 말하지만 정말 그러한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생활이 어려운 북한 주민이여, 전단꾸러미에 집중하라’, ‘한 푼 줄 테니 내 얘기를 들어라’는 메시지가 바탕에 깔린 게 아닌가. 북한 주민에 대한 모욕적 태도를 취하면서 인권을 말할 수 없다. 동냥하듯 던져주는 생활용품은 인권과 거리가 멀다. 상대방을 모욕적으로 처우하면서 이것을 북한 주민의 알 권리라고 표현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실제로 북한주민의 생존권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면 인도적 대북 지원을 보장해야 맞다. 하지만 정권의 성격과 상관없이 인도적 지원을 해야 하는 대한적십자사마저 올해 대북 지원을 전혀 하지 않는 현실에서 ‘1달러’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가.

평화를 위협하는 대북 삐라

더 큰 문제는 대북 전단 살포는 접경지역 주민들의 안전과 생업을 위협하는 것만이 아니라 한반도에 사는 남북 모든 주민을 전쟁 상황으로 이끌 수도 있다는 점이다. 10월 10일 파주 연천 지역에서 대북 전단이 살포됐을 때 북한군과 작은 교전이 있었다. 단순히 총격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북한군은 장사정포까지 갱도에서 빼내 사격 대기했고, 우리 군도 대구 전투비행단에서 F-15K 전투기를 출격, 대기시켰다. F-15K 전투기는 미사일을 최대 20발 장착할 수 있다고 한다. 사실상 준 전쟁 태세, 군사적 대치상태가 대북 전단 살포로 만들어진 셈이다. 게다가 최근 북한은 대북 삐라 살포는 선대 수령들을 모욕하는 ‘전쟁행위’라며 삐라를 ‘기구소멸전투(공중 요격)’하겠다는 전화통지문을 한국 정부에 보냈다. 반면 총리실과 안행부는 몇 년째 ‘대북 전단보내기 국민연합’ 등에 소속된 보수 단체들에게 몇 천만 원씩 해마다 지원했다. 정부가 이들의 활동비를 지원하고 있는데 대북 전단 살포가 정부의 의중과 무관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그런데도 정부가 ’민간단체의 표현의 자유‘라며 대북 삐라 살포를 방치하는 것은 한반도 평화 실현 의지가 없으며, 국민의 생명과 안전보다 대북 정치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정부가 남북긴장으로 이득을 보는 기득권 세력이기에 용인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대북 전단 살포를 강하게 주장하는 서경석 목사(선진화시민행동 대표)는 한반도 평화도 중요하지만 북한 인권도 중요하므로, 남북 대화보다 남북 긴장을 나쁘게 보는 시각이 더 문제라고 주장했다. 이들에게 한반도 평화는 중요 고려점이 아니다. 대북 전단 살포는 남북 대결을 부추기고 한반도 평화를 위협할 뿐 북한 주민의 인권도, 남한 주민의 인권도 보장하지 않는다. 

이렇게 ‘인권’과 ‘권리’라는 말이 여기저기 붙여지며 인간의 존엄함을 왜곡하는 현실에서 조지 오웰의 소설『 1984』가 떠오른다. 소설에서 모든 정보를 조작하고 통제하는 정부 부처의 이름이 ‘진실부’인데, 거기서는 “전쟁은 평화고 자유는 예속이며 무지는 힘이다”라는 슬로건을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주입한다. 언어의 참뜻을 왜곡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과 닮아 있다. ‘인권의 언어’를 가장한 세력들이 인권과 평화를 위협하는 현실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인권감수성에 기반을 둔 시선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