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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인권시평> 도덕적 우위만이 우리의 희망이다

역사의 분수령, 우리는 어떻게 운동을 해야 하는가?

권력의 횡포에 맞서 정의가 언젠가는 이기고야 말리라는 ‘권선징악’ 사상이 때로 ‘펜은 칼 보다 강하다’라는 말로 표현되곤 한다. 펜이 강하냐 칼이 강하냐는 논쟁은 현대사회에서 별로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칼 (최루가스 혹은 탱크)도 펜 (워드프로세서)도 지배자들이 독점하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에게 큰 영향력을 가진 ‘펜’은 경제성장의 필요성을 국민에게 교육함으로써 광고주인 기업의 호의에 보답한다. 그런데 그 기업이라는 것이 어디서나 ‘칼’과 유착관계에 있음이 분명하다. 과학기술의 진보는 권력자에게 보다 규모있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정치적 반대집단을 박해할 무기를 가져다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 폭력을 보다 널리 정당화시키기 위한 수단까지도 가져다 준 것이다. “헌법에 이런 권리가 보장되어 있다”라는 항변은 대체로 아무런 힘도 갖지 못한다. 나는 인권운동가로서 늘 비애를 느끼며 참으로 답답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인권운동가의 비애

최근의 한총련 사태를 보면서 나는 어쩌면 우리가 역사의 분수령에 와 있는 것이 아닌가 라는 느낌을 금할 수가 없다.

한총련의 입장이라는 것은 별로 새삼스러운 것이 아닐 것이다. 즉 나는 80년대 말과 90년대 초에 걸쳐 그렇게도 커다란 세력을 몰고 우리 사회를 풍미했던 전대협의 기본적 노선과 지금의 한총련의 입장 사이에 도대체 어떤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범죄집단’도 ‘좌경 용공’도 ‘폭력시위’도 두 조직이 똑같다. 아니 그 위력이나 실지 영향력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범죄집단’, ‘좌경 용공’ 혹은 ‘폭력시위’는 전대협이 더하면 더했지 한총련이 우리 사회의 기존질서나 기득권 세력을 더 위협했던 것은 아닐 것이라는 말이다. (나는 결코 한청련의 시위를 ‘폭력시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마하트마 간디는 1940년에 “빈틈없이 무장한 강도의 무리를 대적하고 한 사나이가 칼 한 자루로 싸운다면 그는 거의 비폭력적으로 싸우고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했다)

프락치 용의자를 심하게 구타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일, 그리고 (만약에 경찰 발표를 믿는다면) 그것을 은폐하려고 한 일은 확실히 학생운동의 도덕성에 치명적인 상처를 주는 행위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90년대 중반 젊은이들에게는 90년대 초 젊은이들이 가졌던 정의감이나 조국 통일에 대한 열망이 없다 혹은 양자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몰아 붙일 수는 없을 것이다. 사실 프락치 용의자 치사사건이 발생하기 전부터 언론은 한총련을 전대협과는 다른 망나니로 그려내는 데 망설임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도 ‘영웅설화’를 자랑하는 전대협 세대와 파렴치한 범죄집단으로 전락해버린 한총련과의 차이는 무엇인가?


전대협과 한총련의 차이

역사의 분수령…. 나는 이것을 상황이 변했기 때문에 “적들이”라거나 “의장님 따라 배우기” 혹은 “민중”이라는 말을 쓰지 말고 ‘폭력’도 휘두르지 말라는 따위 왜소한 차원에서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상황’은 변했을지 모르나 계급지배와 억압구조는 전혀 변한 것이 없는 까닭이다. 집회와 결사의 자유, 양심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확보하려는 한총련의 ‘폭력’은 그것을 깔아뭉개려는 공권력의 무지막지한 폭력에 비한다면 ‘폭력’ 축에도 끼지 않는다.

우리가 서 있는 ‘역사의 분수령’은 아마도 커다란 세(勢)를 모아 직접행동에 나서야만 했던, 그리고 그것이 가능했던 시대와 그것이 가능하지 않는 시대와의 분수령일 것이다. 그것은 ‘민주주의’라는 게임의 법칙을 소수 지배계급이 묵살했던 시대와 그 법칙에 (지배질서에 위협이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인권의 폭을 서서히 확대하면서) 적어도 따르는 시늉을 하는 시대와의 사이에 있는 분수령이며 ‘펜’이 ‘칼’의 폭압에 굴종하면서 동맹을 이루었던 시대에서 ‘펜’ 스스로의 이익을 위하여 동등한 자격으로 ‘칼’과 동맹을 이루는 시대로 넘어가는 분수령이다.

나는 이 시대를 참으로 암담하고 답답한 시대라고 생각한다. 이 분수령에 서서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꿈을 잃고 일상 속으로 매몰해 가거나 아니면 마치 ‘민주적 절차’나 ‘시민 캠페인’으로써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환상 속에 스스로를 내맡긴다.


비폭력 불복종운동

학생들을 포함해서 우리는 어떻게 운동을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하면 꿈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가? 솔직히 나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물량이나 기술적 차원에서의 대결에서 오는 절대적 열세를 피하는 길을 가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조심스럽게, 아주 조심스럽게 나는 그 길을 비폭력 불복종운동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불복종운동은 정치적 성공을 반드시 보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희생만을 강요하는 무익한 저항일 수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무모한 폭력으로 저항하거나 참을 수 없는 압제에 굴복하고 혹은 자기기만을 감행하는 것만큼은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정신적․도덕적으로는 비폭력 불복종운동 만큼 우리를 우위에 서게 해 주는 길도 없다.

펜이나 칼 보다 강한 것은 도덕성이다. 이 암담한 시대. 도덕적 우위만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일 수가 있는 것이다.

서준식 (인권운동사랑방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