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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인권현장을 뛰는 사람들 ⑩ 박응용 (한국타이어 해고노동자)

수배의 고통 속에서도…


97년 여름 노동계를 뜨겁게 달군 사건이 터졌다. 충남 신탄진에 위치한 한국타이어 공장 앞에서 해고자들의 단식농성이 시작된 것이다. 강제근로와 감시, 노동운동가들에 대한 폭력테러 등 믿기지 않는 사실들이 폭로되었고, 민주노총 등 노동·사회단체의 지원을 받아가며 싸움은 두달여 간 치열히 전개되었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 한국타이어를 상대로 했던 이 싸움 속엔 장기간 수배생활을 하고 있는 해고노동자 박응용(35)씨의 피와 땀이 서려 있었다.


가시밭길 노동운동으로

고등학교를 중퇴한 그는 탄광노동자로서 사회에 첫발을 디뎠다. 3년간의 탄광생활을 정리한 뒤 한 전자회사에 들어갔고, 거기서부터 그의 가시밭길 노동운동은 시작되었다. 민주노조건설 운동에 뛰어들었다가 해고된 것이 88년, 그로부터 6년간의 해고생활 끝에 그는 한국타이어를 찾아갔다.

"입사하기 전부터 한국타이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었습니다. 한국타이어에 다니던 한 친구는 술자리에서 '지옥'이라는 말만 되풀이했어요."

94년 3월 직업훈련원을 거쳐 입사한 한국타이어는 과연 듣던 그대로였다. 회사 철문엔 '신탄진교도소'라는 문구가 적혀 있고, "여길 왜 왔냐, 3개월을 버티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선배들의 첫 마디였다.


'일요일 출근 안하기'부터

하지만 박 씨는 서서히 노동운동의 불씨를 지피기 시작했다. 동기 모임을 꾸리고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마다 찾아다니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 동료 노동자들의 가장 절박한 소망은 "일요일엔 제발 좀 쉬었으면…"하는 것이었다.

"동료와 내기를 했어요. 일요일에 쉬고도 시말서를 쓰는지 안 쓰는지…."

그는 할머니가 입원중이라는 핑계를 대고 내기에서 이겼고, 그것이 곧 한국타이어 노동운동의 시작이었다. 그후 동료들은 돌아가면서 일요일 근무에 빠지는 법을 배웠으며, 이렇게 모여든 동지들을 중심으로 결성한 것이 바로 '축구회'였다.

"한국타이어에선 90년대식 노동운동이 안 통합니다. 70년대식으로 직접 부딪히는 방법 밖엔 없었습니다."

마침내 축구회 결성식이 있던 날, 밀물처럼 작업장을 빠져나가는 동료들의 모습이 박 씨에겐 잊을 수 없는 감동이었다.


희망과 환희의 순간들

그후 18명의 동지들이 모여 노조민주화추진위원회(노민추)를 구성했고, 해를 넘겨 95년 1월엔 본격적으로 노조선거를 준비하는 등 일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이에 회사측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는 과거의 해고경력을 은폐했다는 이유로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었고, 95년 2월 해고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미 지펴진 불은 쉽게 꺼지지 않았다. 4월5일 식목일, '빨간 날'에 쉬고 싶던 노동자들은 "나무 심으러 가자"는 슬로건 아래 출근을 거부했고 이로인해 공장이 멈춰서기도 했다. 그리고 5월, 노조 대의원 선거에서 드디어 민주파 대의원이 20명이나 당선되는 기쁨을 맛봤다. 이어 6월 노조사무실 농성을 통해 '강제근로 중단·노조사무실 24시간 개방·산재 처리 보장·폭행 재발방지' 등을 약속받는 순간은 한국타이어 노동운동의 절정이었다.


기나긴 수배생활의 시작

그런데, 농성이 끝난뒤 농성가담자들이 하나둘씩 다른 도시의 대리점으로 전보됐고, 노민추 내부의 분열마저 겪으면서 상황은 반전됐다. 12월, 가장 가깝던 동료 두명이 구속된 뒤, 박씨에게도 검찰의 소환장이 날라왔고 이때부터 기나긴 수배생활은 시작됐다.


"훔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수배생활은 고통스러웠다. 오갈데 없는 처지다 보니 길에서 밤샘하는 일이 잦았고, 병원 영안실 신세도 많이 졌다. 영안실에 있을 땐 죽은 사람의 모습이 그렇게 편해 보였다고 한다. 먹는 문제도 힘들었다. "구걸생활과 다름없었다. 안 주면 뺏고 싶었고, 훔치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박 씨의 수배생활 중 가장 치떨렸던 순간은 96년 5월 김민주(가명) 씨가 의문의 성폭행을 당할 때였다. 한국타이어에 입사하기 전부터 든든한 후원인이자 동지 역할을 했던 김 씨가 박 씨를 쫓는 남자들에게 성폭행을 당한 것이다. "그날 민주에게 걸려온 전화 첫마디는 '빨리 피하라'는 것이었다. 죽고 싶은 생각뿐이었다"고 말하는 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는 지금도 민주 씨가 사준 신발과 옷을 입고 다닌다. 잊지 않기 위해서다.


전국을 뛰어다니며

힘든 수배생활이었지만 박 씨에겐 해야할 일이 있었다. 그는 전국의 사회단체와 학교, 노동현장을 닥치는 대로 찾아다녔다. 뭉툭한 자료집을 들이밀며, 한국타이어의 현실을 고발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노력은 97년 여름 농성투쟁 당시 각계 노동·사회단체로부터 지원을 끌어낸 밑거름이었다.


배낭 깊숙이 넣어둔 옷

박 씨는 수배생활 중 세번째 맞는 올 겨울이 유난히 춥게 느껴진다고 한다. 주변에선 '자수하라'는 이야기도 많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수배의 고통을 받아들일 작정이다. "동지들의 피눈물이 아직 마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 씨는 수배생활에 들어가던 날 입었던 옷을 배낭 깊숙이 넣고 다닌다. 수배가 해제된 날, 다시 그 옷을 입고 현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다. "목숨을 건 싸움을 하고 싶다"는 그의 말 속엔 시들지 않는 결연함이 배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