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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녹보라, 우리 지금 만나] 현대차 사내하청 성희롱, 부당해고 여성노동자 투쟁을 짚어본다

일곱 번째 이야기 : 적과 보라의 쟁점들

2009년, 현대자동차 아산공장의 사내하청기업 금양물류에서 일하던 한 여성 노동자가 직장동료에게 조장과 소장의 성희롱 사실을 이야기하며 고통을 호소했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았다. ‘잘못된 언행을 감행하여 사내 질서를 문란하게 하고 회사의 이미지를 실추시켰다’는 게 징계의 이유였다. 인사위원회에는 가해자가 버젓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후 2010년 9월, 혼자서 그 억울함과 말 못할 고통을 감당하던 그녀는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넣었다. 그랬더니 회사는 그녀를 아예 해고시켜버렸다. 이후 회사는 정문 앞에서 투쟁하던 그녀를 차도로 밀어버리고, 천막을 부수며 폭행했다. 그리고 이듬 해 1월, 국가인권위원회는 성희롱과 부당해고를 인정하고 배상을 명령했지만 결국 그녀는 서울 현대자동차 본사에서 서초경찰서로, 다시 여성가족부 앞으로 자리를 옮겨가며 지금까지 투쟁을 지속해야 했다.

그런데 누가 보아도 명백한, 그것도 심각한 이 성희롱, 부당해고 사건이 왜 이렇게 오래도록 힘든 싸움이 되어야 하는지 그 배경을 보면 우리는 생각보다 복잡하고 마음 아픈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일곱 번째 가나다 토론회는 여성가족부 앞에서 당사자 여성노동자와 함께 투쟁하고 있는 권수정 대리인과 공무원노조 박이은희 여성위원장을 모시고, 그 복잡하고 슬픈 현실들 속에 자리한 적과 보라의 쟁점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성노동자 통제 수단으로써의 성희롱과 노조의 가부장성

권수정 대리인은 처음 투쟁을 시작할 때 이 싸움의 의미를 “대기업의 하청 노동자가 일상적 성희롱과 해고에 얼마나 취약한 위치일 수밖에 없는지”에 두었지만 이후 이 문제에 공감하여 찾아오는 수많은 여성들을 보면서 “이것이 과연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의 문제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현장에서 임노동의 관계에 있는 대부분의 여성노동자는 일상적으로 성적 수치심을 견뎌야 하고 그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면 해고까지 각오해야 하기에 결국에는 임금, 노무관리, 노동관계에 대한 여타의 문제제기도 할 수 없게 된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관리자들은 권력관계를 과시하듯 성희롱을 일상화한다. 성희롱, 성폭력에 대해 문제제기를 할 때 자신의 생존을 걸고 얘기하지 않으면 할 수가 없다는 것은 결국 성희롱이 여성 노동자에 대한 자본의 통제 전략, 착취 전략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 최근 권수정 대리인이 가지게 된 생각이다. 그래서 이 문제는 정규직, 비정규직, 공무원, 선생님 가릴 것 없이 모든 여성 노동자의 문제이며, 대한민국 전체가 인권의 사각지대인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 끔찍한 폭력과 착취의 카르텔을 뚫고 나와 싸움을 시작하면, 이번엔 노조의 가부장성과 관료주의의 벽에 부딪히게 되기 때문이다. 성희롱의 문제를 개인의 사소한 문제로 보는 시각, 조직의 투쟁방향에 따르기만을 요구하고 입장을 달리하면 투쟁을 지원조차 하지 않는 노조의 태도는 용기를 내어 투쟁을 시작한 여성 노동자를 더욱 힘들게 한다. 권수정 대리인은 일전에 ‘농성장 일기’에도 썼던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했다. 여성가족부 앞 농성 100일이 지나서 농성장을 찾아온 노조의 지회장과 교선부장이 “불법파견 투쟁이 끝나지 않으면 절대 복직할 수 없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권수정 대리인은 “사측이 그런 태도를 보이면 분노하지만 노조의 동지들이 이런 태도를 보이면 우리는 앓아 눕는다”며, 방법을 찾고 함께 싸우기에 앞서 선험적으로 판단을 내려버리고, 오히려 투쟁 당사자의 의지를 꺾게 하는 노조의 태도를 비판했다.

박이은희 여성위원장은 “처음 상경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가슴이 뻥 뚫려서 바람이 지나가는 느낌이었다”며 민주노총 성폭력 문제 등 그간 숱한 성폭력 사례들을 접하며 느꼈던 좌절과 우려가 이 투쟁에 대한 기대보다 먼저 다가왔음을 고백했다. 그간의 투쟁들을 통해 그가 알게 된 사실은 성희롱, 성폭력 문제로 투쟁을 시작하면 결국 “가해자와 피해자가 전선에 서게 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 하나를 중심으로 온갖 전선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피해자는 온갖 전선에 맞서 싸워야 하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조직된 노동자들’이라며 이것이 투쟁하는 이들을 매우 힘들고 피곤하게 한다고 지적했다.

박이은희 여성위원장은 특히 성희롱, 성폭력의 문제가 현장에서는 성별의 문제로만 생각되거나 혹은 너무 광범위하게 인권침해로 규정되는 것의 문제점을 언급했다. 현대 전쟁에서 성매매, 강간, 낙태, 출산정책 등으로 여성의 몸을 통제하는 것처럼 노동현장에서는 자본이 여성의 몸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노동을 통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희롱, 성폭력 사건에 대한 투쟁이 진행되면 이 투쟁은 노동현장의 문제와 별개인 것처럼 다뤄진다. 그는 그런 점에서 이 투쟁이 성희롱 투쟁으로써만이 아니라 노동과 자본의 문제로까지 확대되고 있다는 사실이 매우 유의미하다고 평가했다. 결국 조직 내에 있는 사람들이 현장의 성희롱, 성폭력 문제에 대한 시각을 확대하고, ‘자본이 성을 어떻게 노동통제의 도구로써 활용하고 있는지’, ‘가부장제와 성별화된 여성 노동의 문제, 부불노동의 문제는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등에 이르기까지 고민을 확장하지 않으면 계속 겉만 건드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성노동에 대한 고민이 보다 확장되기를

박이은희 여성위원장은 “현장에서는 ‘여성노동’을 이야기하면 분리주의적으로 인식한다. 실상 분리가 아니고 여성노동에 대한 내용 자체가 없다는 것은 인식하지 못한다”며 “현장은 여성 문제의 내용과 감수성 측면에선 거의 공백상태”이고 이에 대한 문제제기나 교육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여성노동’에 대한 보다 확장된 고민과 현장에 맞는 시각을 가지고 현장 교육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좋겠다고 한다. 한편, 권수정 대리인은 처음에는 자신도 이 투쟁을 시작하며 가해자와 사측에 대해서만 분노했지 그 배경에 자리하고 있는 착취 전략을 인식하지 못했다면서 노동운동 진영이 이 문제를 깊이 있게 이해하고 대응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10여 년 전에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투쟁을 할 수가 없다’라는 생각에 맞서서 싸웠던 것처럼, 노동 현장에서의 성희롱 문제도 그 안에 숨겨진 착취의 시스템을 발견해 가면서 싸움을 확대해 나간다면 10년 후에는 좀 더 다른 모습의 싸움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토론회 하루 전 날인 11월 10일, 김진숙 지도위원과 정홍형, 박영제, 박성호 세 명의 노동자가 크레인 위에서 내려와 땅을 밟았다. 김진숙 지도위원은 309일, 세 명의 노동자는 137일만이었다. 김진숙 지도위원과 세 명의 노동자들이 무사히 내려오기를 간절히 염원했던 모든 사람들이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며 그 장면들을, 한진중공업 투쟁의 승리를 지켜보았다. 노동조합에서는 ‘끝난 투쟁’, ‘어차피 진 싸움’이라 치부하고 말았던 한진중공업 투쟁이 마침내 결실을 맺고 지상에서 그들과 함께했던 수많은 ‘진심’들과 감격의 포옹을 할 때, 권수정 대리인은 남다른 감회를 느꼈다고 했다. 이 싸움이 ‘될 싸움인지’ 판단하기 이전에 그들의 절실함과 고통을 이해하고 마음으로 연대한 사람들, 그 간절함이 이루어낸 새로운 가능성과 희망을 보며 현재 진행 중인 투쟁에 대해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권수정 대리인은 항상 “우리 농성장은 참 풍요롭다”고 말한다. 투쟁이 길어지고 날씨마저 추워지면서 농성은 여러모로 힘들어지고 있지만 마음으로 연대하고 무엇이든 적극적으로 함께하는 이들이 있기에 이 농성에 대한 자신감을 확인하게 된다고. 11월 21일 현재 여성가족부 앞 농성은 173일째를 맞이한다. 이제 이 농성장의 상징이 된 ‘작은 꽃 아픔으로 피다’라는 문구대로 이 풍요로운 연대 속에서 마침내 그 꽃이 활짝 피어날 날이 하루 빨리 올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덧붙임

나영 님은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