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계 비판엔 ‘나 몰라라’ 사오정
국가인권기구를 법무부의 영향력 아래 두려는 법무부의 입장이 전혀 달라지지 않고 있다.
법무부는 지난 9월 25일 국민인권위원회 설치를 골자로 하는 인권법 시안을 발표하면서, 특수법인 형태의 국민인권위원회를 설치하고, 인권위에 시정권고권 수준의 권한만을 부여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에 대해 민간단체는 물론, 새정치국민회의와 언론 등도 국민인권위의 독립성과 효율성이 실종될 것이라고 비판했지만, 법무부는 이러한 목소리들은 외면한 채 기존의 인권법 시안만을 고집하고 있다.
이같은 법무부의 고집은 16일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인권법 제정 공청회’에서 거듭 확인됐다. 법무부와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회가 공동주최한 이날 공청회에서 곽무근 검사(법무부 인권과장)는 “인권보장의 일차적 책임은 국가기관에 있고 ‘국민인권위원회’는 기존 국가기관의 틈새를 보충하는 기관에 불과하다”는 이른바 ‘틈새론’을 들먹이며 종전의 주장을 되풀이했다.
앵무새처럼 종전 주장 되풀이
이러한 법무부측 주장에 대해 8명의 지정토론자들이 나와 국민인권위의 위상과 권한 등 다양한 쟁점을 놓고 격돌했다.
오병주 검사(대전지방경찰청 특수부장)는 “이미 현행법이 인권을 잘 보장하고 있으며, 인권법은 국제추세를 반영하기 위해 만드는 것”이라는 엉뚱한 발언과 함께 ‘틈새론’을 적극 옹호했다. 또 김성남 변호사(경실련 중앙위 의장)도 “인권위원회가 국가기구로 설치될 경우 관료화될 우려가 있다”며 법무부측 주장을 지지했다. 김 변호사는 전체적으로 법무부가 마련한 시안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법무부 주장 곳곳에서 면박
반면 조용환 변호사, 곽노현 교수(방송대), 홍성필 교수(이화여대), 문준조 박사(한국법제연구원 국제법제실장) 등은 법무부의 틈새론 등을 적극 비판하며 특수법인화의 문제점, 권한 강화의 필요성 등을 지적했다.
곽노현 교수는 “법무부 안은 국민의 안이 아닌 법무부장관의 ‘나홀로 법안’에 불과하다”며 “독립성이 보장되지 못한 법안의 기본골격이 바뀌지 않는 한 법무부안은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기존 사법부와 행정부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국가인권기구 설치를 권고하는 것인데, 어떻게 국가인권기구가 보충적 기구가 될 수 있느냐”며 틈새론의 시각 자체를 비판했다. 또 문준조 박사와 조용환 변호사도 “특수법인 형태로는 한국사회에서 태생적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며 “독립된 국가기구로 설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권위의 권한과 관련, 법무부측은 “인권위원회는 도덕성에 기반한 기구인 만큼 시정권고권만으로 국가기구에 대한 감시견제가 가능하다”고 주장한 반면, 홍성필 교수는 “권위가 서기 위해서는 권한도 충분히 확보되어야 하는 데 그걸 왜 우려하는지 모르겠다”는 지적으로 일축하며 “인권위원회엔 포괄적인 권한이 부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법무부장관이 인권위원에 대한 임명제청권을 갖는 문제 또한 공방의 대상이 됐다.
먼저 오병주 검사는 “인권단체에 추천권을 부여할 경우 인권위원회가 정치단체화할 우려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조용환 변호사는 “인권단체가 추천권을 가져야한다고 주장한 적이 없으며, 인권기구의 독립성이 보장되도록 임명절차를 투명화하라고 요구했을 뿐”이라고 밝혔다. 이어 “같은 논리로 법무부장관이 추천권을 갖게 될 경우 독립성이 보장될 수 없는 것이 당연하지 않냐”고 반박했다.
또한 오 검사가 “국가기구로 설치할 경우 업무가 중복된다”고 주장하자, 조용환 변호사는 “특수법인 형태로 만들면 업무의 중복을 피하는 것이냐”며 모순을 지적하는 등 이날 법무부측의 주장은 곳곳에서 면박을 당했다. 한편 조용환 변호사, 문준조 박사 등은 “법무부가 마련한 인권법 시안에는 인권에 관한 내용이 너무 부족하다”며 ‘인권법’이라는 명칭을 ‘국민인권위 설치에 관한 법률’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번 공청회를 통해 각계의 다양한 의견이 제시됐지만, 이를 법무부가 적극 수렴할 의사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곽무근 검사는 “이미 다양한 시민사회의 의견을 참고해 법안을 만들었으며, 앞으로 공청회는 예정되어 있지 않다”고 말해 법무부 안대로 입법을 강행할 뜻을 내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