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잡지를 만들다보면 다양한 장애인들을 만나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 흔히 소외계층으로 불리는 장애인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얼마 전 장애를 가진 한 여성을 만난 적이 있다. 이 여성은 은어로 ‘기바리’라고 부르는, 거리에서 바닥을 기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상대로 구걸을 해서 먹고사는 여성이었다. 이 여성은 소아마비로 양 다리가 불편한 상태였고, 나이는 마흔 두 살 이었다. 그녀가 거리에서 구걸을 하게되기 까지는 사연이 있었다.
‘기바리’ 여성
그녀는 어려서 장애를 가지게 되면서 부모로부터 버림받았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어려운 가정 형편이 부모로 하여금 그녀를 재활원에 맡기게 했을 것이다. 부모 얼굴도 모르고 재활원에서 자란 그녀는 재활원에서 겨우 초등학교를 마치고 나이 스무 살 때 사회로 나왔다. 장애 때문에 몸도 팔 수 없었던 그녀가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동양자수 놓는 일을 기술이라고 배웠는데 수요가 없어 유일하게 배운 기술이 생계를 이어가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녀는 몇 군데 전자부품 조립 공장을 전전했고, 그러다가 그녀 나이 서른세살 때 공장에서 만난 같은 처지의 장애인 남성을 만나 동거 생활을 시작했다. 부부는 어렵게 아이도 하나 낳았다.
아이가 생기면서 부부는 정말 열심히 일 했다. 하지만 저임금은 세 식구 생계를 이어가는데도 턱없이 부족했고, 그나마 다니던 공장이 일감을 확보하지 못해 문을 닫으면서 부부는 거리로 나앉게 됐다. 처음 그녀는 어떻게든 직장을 알아보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마흔이 넘은 나이에다 목발을 짚고 다니는 그녀를 고용하겠다는 직장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같은 처지의 남편 역시 직장을 알아보다가 취업이 안 되자 낙심해 주저앉아 버렸다. 남편은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고, 술만 먹으면 울분을 그녀에게 쏟아냈다. 남편은 그녀에게 돈을 벌어오라고 내몰면서 구타를 해댔다. 별 수 없이 그녀는 거리에서 구걸을 해야 하는 처지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사람이 아니다”
길을 걷거나 지하철을 타면 사람들을 상대로 구걸을 하는 장애인들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들 장애인들 모두가 이 여성처럼 가슴 아픈 사연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적어도 구걸을 하는 장애인들 다수는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구걸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어느새 장애인들에겐 구걸이 하나의 직업이 된 것이다.
구걸을 인간의 자존심을 포기해야 가능한 행위다. 구걸을 하기 위해서는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수치심도 느끼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구걸을 하면서 ‘나는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을 하루에도 수없이 많이 되뇌인다고 한 시각장애인은 말하고 있다.
그러면 무엇이 장애인들로 하여금 인권이라는 말이 무색한 구걸 행위에 나서게 만들고 있는 것일까? 우선 구걸을 하는 장애인들 대다수가 성인장애인들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 나라의 성인장애인들은 대부분 경제 형편이 어려웠던 오육십년 대에 태어났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때는 소아마비가 창궐했으며, 기타 전염병으로 시력이나 청각을 잃는 아이들이 많았다. 이렇게 개인의 잘못 때문이 아닌 어려운 나라 형편 때문에 생겨난 장애인들은 또한 소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교육 혜택을 받지 못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대신 장애인들은 기술을 배워야 살 수 있다고 해서 기술을 배웠는데 그 배운 기술이 남자는 시계수리나 인장 새기는 기술, 여자는 수예나 편물을 놓는 사양업종이 주를 이뤘다.
결국 장애인들이 먹고 살수 있다고 해서 배운 기술은 지금에 와서는 장애인들의 생계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이런 실정에서 성인장애인들은 현재 거의 다 가계를 책임지고 꾸려가야 할 위치에 있다. 정부가 생활이 어려운 장애인들을 생활보호대상자로 지정해서 일인당 10만원 안팎의 생계비를 지원해주고 있지만 별다른 생계 수단이 없는 성인장애인들이 아이들을 교육시키고 생계를 이어가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지원이다. 그래서 성인장애인들은 구걸을 직업으로 택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장애인들의 구걸이 직업으로 가능한 것은 사회적으로 장애인들은 동정의 대상이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기 때문이다.
지금이 문명사회인가?
이 모습이 이천년 대를 눈앞에 둔 우리나라 성인장애인들의 자화상이다. 정상적인 직장은 꿈도 꿀 수 없어서 사람들의 동정에 기대 겨우 생계를 꾸려 가는 구걸 장애인들, 백 번 양보해도 장애인들이 구걸을 해서 먹고사는 사회는 정상적인 사회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지금 구걸로 먹고사는 장애인들의 생계를 보장해 줄 수 있는 대책이 절실하다. 그들을 격리 수용하겠다는 발상은 절대 대안이 될 수 없다. 구걸 장애인들이 인권을 가지고 사회에서 떳떳하게 살 수 있도록 정부와 사회는 지금 당장 관심을 가지고 복지대책을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문명사회라면 당연히 사회 약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지금 구걸장애인들은 차가운 거리에서 어려워진 경제 형편과 사람들의 싸늘한 눈길 때문에 큰 고통을 겪고 있다. 그 고통을 우리 사회가 껴안고 궁극적으로는 구걸 장애인들을 우리 곁에서 찾아 볼 수 없도록 사회구성원 모두가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 노력의 일환으로 만약 거리에서 구걸 장애인들을 만난다면 외면하지 말고 따뜻한 말 한 마디라도 건네보기를 권하고 싶다.
이태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부설 월간『함께걸음』편집부장)
- 1301호
- 이태곤
- 1999-0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