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수년간의 외국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친구에게 물었다.
"뭐 달라진 것 별로 없지?". 그 친구 왈 "아니야 많이 달라졌는데... 주류가 변했어..."라는 것이다. 나는 놀라웠다. 그리고 공항 도착과 함께 우리 사회 그것도 주류의 변화를 실감할 정도로 눈썰미를 갈고 닦아 온 것이 놀랍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의 놀라움을 옆눈질 하며 그 친구는 또 덧붙였다. "OB가 HITE한테 밀린 것 아니야 이거!"
그렇다. 우리 사회는 최근 이른바 카피라이터라는 각광 받는 업종을 만들게 하였다. 어떻게 새로운 브랜드와 이미지를 만드는가는 제품의 판촉과 밀접한 연관을 갖게 되며, 고착화되다시피 한 수십 년의 아성도 깨트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광고문구의 현란함은 제품의 질과는 반드시 직결되는 것은 아니며, 카피라이터 자신들이 인정하듯이 테크닉 그 자체이다. 어떻게 순간의 인식에 파고들어 승부를 낼 것인가, 어떻게 이미지를 조작할 것인가가 중요한 승부처인 세계인 것이다. 따라서 민주적인 절차를 중요시하는 정치의 세계에서는 도저히 통용될 수 없는 아니 통용되어서는 안되는 것이 카피라이터적인 순발력과 세계관일지도 모른다.
김대통령의 브랜드
그러나 우리 정치의 주류들 가운데는 카피라이터를 자임하는 이들도 많은 것 같다. 지난 3월 25일 청와대의 한 관계자가 이렇게 밝혔다고 한다. "김대중 대통령이 이끄는 한국의 새로운 브랜드는 인권이다". 또 홍순영 외교통상부 장관도 "국제적으로 인권국가 이미지의 홍보와 인권외교를 강화하기 위하여 출국"한다고 밝혔다고 한다.
물론 그 동안 김 대통령만의 정체성을 뚜렷이 할 기회를 갖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지난 1년은 전 정권이 물려준 경제적 난제를 해결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김 대통령 자신도 법무부의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경제건설이나 남북문제 해결보다는 인권수호대통령으로 기록되는 게 소망"이라고 밝혔다고 한다.
그러나 인권브랜드는 민주적인 절차와 밀접 불가분한 관계에 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 동안 우리 사회에 수많은 인권문제는 민주적 절차를 무시한 정치권력에 대한 항의와 이에 대한 탄압의 연속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국민에 의한 정부가 아니었기 때문에 더욱 더 인권문제가 쌓이고 쌓였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국민에 의한 정부라고 할 수 있으려면, 인권수호대통령으로 기록되려면 민주적인 절차를 생명처럼 중요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법무부는 지난 3월 22일 시민단체 등의 거센 반발을 뒤로한 채 김 대통령 인권브랜드의 요체라고도 할 수 있는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 설치를 포함한 인권법안을 집권당과 합의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민간단체와의 협의를 진행하지 않은 채 당정간에 '날치기' 합의된 원안대로 25일 차관회의와 30일 국무회의에 상정시켰다.
그 내용인 즉 첫째, 법무부를 상위기관으로 둔 특수법인으로 '인권위'를 위상 지우고 있다. 둘째, '인권위'의 구제대상을 교도소나 정신병원과 같은 다수인 보호시설의 고문 구타 불법구금 등 8가지 형사범죄와 차별행위(성, 종교, 지역, 국적 등)로 제한하고 있다. 셋째, 문제가 발견되더라도 '인권위'는 권고만 하지 명령을 할 수 없게 하였다.
이와 같은 당정 합의안에 대한 시민단체의 반응은 이만 저만 실망스러운 것이 아닌 것 같다. 특히 의문사를 당한 유가족들은 3월 31일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삭발을 하여 항의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인권법 제정 및 국가인권기구설치 민간단체 공동추진위'에서도 법무부가 상위기관이고 인권위구성에 법무부의 영향력이 행사되는 마당에 어떻게 인권기구가 제구실을 할 수 있으며, 신속한 구제를 목표로 하는 인권위가 권고만을 하게 되어 있으니, 인권위가 유명무실화된 것 아니냐고 비판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로서 그 동안 국민회의 법안에 부족한 점이 있어도 이를 비판적으로 지지했던 민간단체들도 이제는 모두 항의단체로 변할 것이 명백해지고 있는 것 같다.
특히 민주적 절차를 무시하고서, 인권을 위해 노력한 인권단체와 법조인들을 완전히 무시하고 법무부가 '혼자 치고 나갔다'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오점으로 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카피라이터와 정치의 혼동
이러한 사태의 배경에 카피라이터와 정치를 혼동하는 법무부의 이기심과 경쟁심이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우리 사회의 인권문제가 왜 산적하고 있는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있었다면 이처럼 민주적인 절차를 무시한 법안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는 의구심이 들뿐이다.
이번 주말에는 친구에게 전화연락을 할 참이다. 그간 귀국 이삿짐 정리도 되었을 터이니 한숨 돌려 맥주나 한 잔 하자고. 그리고 이야기 할 생각이다. 공항도착과 함께 우리 사회 그것도 주류들의 사고방식을 간파하고 있었던 친구의 화두를 깊이 새기지 못하고서, '아직도 정신 못 차렸냐'고 핀잔했던 내가 경솔했다고 말이다.
이경주 교수(경북대 법학부)
- 1342호
- 이경주
- 1999-0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