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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특집> 5.18은 끝났는가 ③ 미국의 역할

광주학살 '방조·승인'


5.18과 미국.
광주학살의 진실과 관련, 반드시 규명되어야 할 문제 가운데 하나가 바로 5.18 당시 미국의 역할이었다.

이와 관련, 지난 96년 미국의 유력 일간지 <저널 오브 커머스>지가 공개한 극비문서는 5.18 당시 미국의 역할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저널 오브 커머스>지가 입수한 극비문서에 따르면, 5․18 당시 미국은 특전사의 광주투입 계획을 사전에 인지하고도 묵인했으며, 광주의 무력진압에 대해 '지지'를 결정하는 등 광주에서의 학살을 '방조․승인'했다는 결론에 이른다.


10․26부터 한국상황 주시

96년 공개된 극비문서에 따르면, 카터 미 대통령은 79년 10․26사태 직후 행정부내 극소수 최고위급 관리들을 모아 '체로키'라는 암호명의 비상대책반을 운영했다.

비상대책반은 한국에서 진행되는 사태를 추적하면서, 서울에 있는 주한 미대사관측과 지속적으로 비밀전문을 교신해왔다. 비상대책반에는 사이러스 밴스 국무장관, 워런 크리스토퍼 국무부 차관, 리처드 홀브루크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 대사 등이 참여하고 있었다.


군부대 투입 계획 사전 승인

80년 5월 7일, 카터 행정부는 시위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군부대를 투입하려는 한국 정부의 계획을 승인한다. 미 행정부는 이 비상계획이 서울과 광주에 특전사 부대를 배치하는 계획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96년 공개된 극비문서에 따르면, 군부대 투입을 위한 비상계획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미국의 보증은 글라이스틴 대사에 의해 이뤄졌다.이에 앞서 크리스토퍼 국무차관과 홀브루크 차관보는 이를 사전 승인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5월 7일 워싱턴에 보낸 비밀전문을 통해 "법질서 회복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면 한국 정부가 군대를 투입해 경찰력을 강화하려는 비상계획을 미국정부가 반대한다는 암시를 주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다음날 크리스토퍼 차관은 "우리(미국정부)는 법과 질서 유지를 위한 한국정부의 비상계획에 반대해서는 안 된다는 데 동의한다"는 내용의 답신을 보낸다.

미국이 특수부대의 이동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한국군이 주한미군 지휘관들에게 '우발적인 목적으로' 또 '만일의 학생데모에 대처하기 위해' 공수부대 2개 여단을 서울과 김포지역으로 이동시키고 있음을 전해왔다"는 5월 7일 글라이스틴 대사의 보고전문에서도 드러난다.

그러나, 미 국무부는 89년 한국 국회의 '5․18 광주민주화운동 조사특별위원회'가 보낸 질의서에 대한 공식 답변서에서 "공수부대를 광주에 파견한다는 사실을 사전에 알지 못했다"고 오리발을 내밀었다.


광주 무력진압 지지

카터 행정부는 5월 22일 백악관 고위 참모회의에서 전두환의 광주 진압을 지지하기로 결정한다.

극비문서에 따르면, 5월 22일(한국시각 23일 새벽) 백악관 상황실에서 열린 백악관정책검토위원회는 "한국당국이 최소한의 병력을 사용해 광주의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라는 데 대체로 의견을 모았다.

여기서 브레진스키 안보보좌관은 "한국정부에 단기적으로 지지를 보내되 장기적으로는 정치적 진전을 이룩하도록 압력을 행사해야 할 것"이라고 대책을 요약한다.

그리고 백악관 회의 후 수 시간이 지나 글라이스틴 대사는 박중훈 국무총리 권한대행을 방문해 미국의 입장을 전달한다. 글라이스틴은 전문을 통해 "두 사람이 폭동을 진압하기 위한 강력한 조처가 필요했다는데 동의"했으며 "광주에서 사용할 연합사 병력을 잘라내 한국군의 지휘권 아래 두는 문제에 대한 미국의 긍정적인 대답을 박 총리 대행에게 전했다"고 밝혔다.


"한반도 안정" 목표

미국이 광주에서의 무력진압을 지지하는 등 전두환의 신군부에 힘을 실어준 이유에 대해 <저널 오브 커머스>지의 팀 샤록 기자는 "한국에 위기상황이 벌어진 80년은 미국이 이란인질 사건에 휩쓸린 데다, 소련과의 긴장이 심해지던 때였다"며 "미국은 한국이 또 다른 이란이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며 한국의 정치적 불안정이 한반도를 또 다른 위기지역으로 만들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야말로 전두환 집권기간의 중요한 정책 목표였다"고 지적하고 있다.


미국의 오만

5․18 당시 미국의 역할에 대한 인식은 그후 남한에서의 반미투쟁을 본격화시키는 주요 계기가 된다.

82년 부산 미문화원방화투쟁, 85년 서울 미문화원점거농성, 그리고 86년 김세진․이재호 열사의 분신투쟁 등 일련의 반미투쟁을 통해 한국 민중들은 5․18 당시의 미국의 역할에 대해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해왔다.

그리고 96년 공개된 미국 내 극비문서를 통해 5․18 당시 미국이 광주학살을 방조․승인했다는 점은 주장이 아닌 사실로서 입증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아직 미국은 5․18 당시의 역할에 대해 명확한 해명도 없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제3세계 민주화투쟁을 사사건건 방해놓고 가로막아왔던 미국의 오만을 더 이상 두고 볼 수만은 없다.

[자료: 시사저널 제33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