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상규명 거부…유족 등 반발 거세
"억울한 사람을 죽여놓고서 지난 50년간 모른 채 한 것만으로도 오장육부가 뒤집힐 일인데 이제는 조사마저 못 하겠다니요, 세상천지에 이런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노근리 양민학살 진상조사를 위해 방한 중인 루이스 칼데라 미국 육군부 장관이 노근리 외 지역에 대해 진상조사를 확대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11일 밝힘에 따라 희생자 유족들은 물론 시민사회단체의 비난 여론이 거세다.
50년 7월 이리역 미군 폭격 사건으로 부친을 잃은 '이리역 희생자 유족회' 회장 김대규(원광대) 교수는 "고의든 고의가 아니든 양민학살이 진행된 것은 확실한 사실"이라며 "똑같은 양민학살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노근리 외에 다른 지역을 조사하지 않겠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분개했다. 김 교수는 "미국이 제대로 된 나라라면 의혹에 대한 진상조사 작업에 즉시 착수하는 것은 물론 유족들에 대한 공식사과와 보상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군의 무차별 총격에 의해 주민 74명이 학살됐다고 주장하고 있는 곡안리 학살사건 유가족 대책위원회의 이만순 위원장도 미국의 조사 중단 발표에 분노를 표했다. 이 위원장은 "미국이 조사를 중단한다면 미국을 상대로 한 법적 소송과 할 수 있는 모든 대책을 강구하겠다"고 밝혔다.
미국 인권침해 전면대응 준비
11일 언론을 통해 이 소식을 전해들은 시민사회단체들도 "어이없다"는 입장을 보이며 사태해결을 위한 대책마련에 나섰다.
양민학살대책위원회, SOFA개정 국민행동, 전국연합 등 9개 사회단체는 12일 오후 회의를 갖고 향후 계획을 논의했다. 이들은 "현재 미국측 입장에 대해 많은 시민사회단체들이 분개해 있는 것이 사실"이라며 "이 문제 뿐 아니라 고엽제 문제, 파주 폭발물 사태 등과 관련해 많은 시민사회단체들이 공동으로 대처하기로 잠정 합의했다"고 밝혔다. 따라서 이들은 빠른 시일내에 미국에 의한 한국민 인권침해에 대한 전국적인 연대기구를 건설하기로 했다.
익산지역 시민단체들로 구성된 '양민희생사건 진상해결 익산시민대책위'는 12일 성명을 내고 "주한미대사관이 노근리 사건을 처리한 후 나머지 양민학살 사건에 대해서도 빠짐없이 조사하겠다고 대책위에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저버리고 말았다"며 "미국은 당장 파렴치한 입장을 철회하라"고 촉구했다. 마산지역 양민학살 대책위도 "미국이 양민학살 조사에 나설 때까지 미 클린턴 대통령과 미 국방부 장관 앞으로 조사를 촉구하는 서한을 보내겠다"고 밝혔다.
"한국정부 발벗고 나서라"
시민사회단체는 또 한국정부에도 사태해결을 위한 대책마련을 요구했다. 경상도 일대에서 양민학살 진상조사를 벌이고 있는 '대구 울산자치 시민모임'의 배종진 사무국장은 "미국이 조사를 중단하겠다고 했다면 당연히 한국정부가 나서야 한다"며 "한국정부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진정한 한국국민의 정부라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