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거리에서 잠자리까지 모든 게 배제된 사람들
"그들을 폐인으로 낙인찍기보다는 냉혹한 경쟁논리를 문제삼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들도 우리의 이웃이다"
11월 8일 오전, 불이 난 곳은 여전히 흉물스럽게 방치되어 있고, 공터에는 성큼 다가온 겨울날씨에도 열댓 명의 주민들이 여느 때처럼 줄지어 서서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지난 1일의 화재사건 이후 수면 위로 떠오른 도심 속 가난의 섬, 영등포 쪽방 지역. 화재 사건은 이들에게 한 순간 지나가는 폭풍우에 불과하다. 그들에겐 쪽방의 삶 자체가 근심거리이자 고통이기 때문이다<본지 11월 4일자 참조>.
이들에겐 우선 끼니 걱정이 가장 크다. 쪽방 사람들은 막노동, 행상과 같은 불안정한 일을 하거나 그나마 일도 갖지 못한 도시의 최빈곤층이다. 더구나 가족이 없거나, 있어도 관계가 끊긴 지 오래 되는 이들이 대부분이라 가족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다. 따라서 누구보다도 국가의 지원이 절실한 사람들이지만, 기초생활보장의 대상조차 되지 못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주민등록이 말소돼서 말이지"라고 그 이유를 설명하는 윤수철(70)씨는 위장병, 고혈압에다 최근엔 발까지 마비돼 수세미 장사를 나가지 못한다. 어느덧 매달 15만원인 방값이 백만원 넘게 밀렸다. 하지만 말소된 주민등록을 갱신하기 위해 본적지인 전남 보성까지 내려가는 것도, 갱신 비용 10만원도 윤 씨에게는 만만치 않다.
주민등록이 말소돼 생활보장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윤 씨 외에도 줄잡아 수십 명이다. 다리가 절단돼 일을 할 수 없는 장호순(43)씨는 부인이 있다는 이유로 생활보장 대상에서 제외됐다. 부양의무자 기준에 걸린 것이다. 하지만 장 씨의 부인은 집을 나가 소식이 끊긴 지 4년 째, 그는 종교단체에서 주는 밥으로 끼니를 연명해왔다.
건강 문제도 심각하다. △기초생활보장 수급권자로 인정받지 못해 아예 의료보호증이 없는 경우 △의료보호증이 있어도 의료혜택을 받을 수 있는 항목이 한정된 경우 △병원에서마저 자신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경우 등 병원 치료를 받지 못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주소 이전을 못해 이제껏 의료보호를 받지 못한 원경관 씨는 2-3년 전부터 폐결핵을 앓기 시작해 이제는 더 이상 손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채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다. 인근의 '요셉의원'에서 간혹 무료진료를 받았지만, 먹는 것이나 주변 환경이 병을 극복하기엔 너무 열악했다. 결국 원 씨는 '술'에 의지해 고통을 달래고 있다.
쪽방의 주거환경 역시 인간다운 생활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 공터에 서 있던 김창수 씨는 추운데 왜 나와 있냐는 물음에, "불이 안 들어오는 냉방에 있느니 여기 있는 게 낫다"며 추위 속에 자느라 더 무거워진 몸을 목발에 의지한다. 또 난방이 된다하더라도, 골목마다 매캐한 연탄 냄새는 쪽방 주민들이 연탄가스의 위험에 무방비 상태로 있음을 말해준다.
화장실 문제도 골칫거리다. 건물마다 화장실이 없어 대부분 공중 화장실을 이용하는데, 쪽방 8백20여 개에 공중화장실은 5개 뿐. 쪽방 거주자 중 많은 수가 장애인임에도 장애인용 화장실은 아예 없다. 김귀호 씨는 "아침에 나가보면, 화장실 앞마다 대여섯 명이 줄을 서 있어. 그러니 한참을 기다릴 수밖에"라며 불만을 터뜨렸다. 이밖에도 변변한 목욕시설이나 부엌을 찾기 어려운 것은 물론이다. 방의 크기도 1평이 채 안 돼, 1인 가구 최저주거면적 3.6평(정부 최저주거기준)에 한참 모자란다.
하지만 쪽방 주민들에겐 그래도 이곳이 사생활이 보장되는 유일한 보금자리다. 그런데 이 공간마저도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영등포구청이 쪽방 이용자들에 대한 아무런 주거대책 없이 쪽방 지역을 녹지로 바꿀 계획이기 때문이다. 이대로 될 경우, 쪽방 이용자들은 최소한의 주거공간도 없는 노숙자가 될 수밖에 없다.
화재사건을 계기로 영등포 쪽방 지역 문제를 공동으로 대응하기 위한 움직임도 생겨나고 있다. 노숙자주간편의시설을 운영하는 햇살보금자리, 전국실직노숙자대책종교시민사회단체협의회, 참여연대사회복지위원회, 건강연대, 한국도시연구소 등은 우선 주민등록 말소, 부양의무자 기준 등의 이유로 기초생활보장 대상에 끼지 못한 이들이 급여를 받을 수 있도록 돕고, 쪽방 거주자들의 건강을 위해 보건소가 제 역할을 다하도록 촉구할 예정이다. 또 녹지 조성을 추진할 경우, 대안적인 주거시설을 마련하도록 영등포구청에 요구할 계획이다. 이밖에도 일상적으로 주민들과 인간관계를 맺으며, 생활 편의시설 및 자활교육을 제공하기 위한 쪽방 상담소의 설치가 시급한 과제로 제기되고 있다.
한편, 한국도시연구소에 따르면 이러한 쪽방이 서울에만 3천5백개, 전국적으로 8천2백개 정도가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이 곳에 터잡고 살아가는 4-5천여 명의 사람들은 '부랑인'이나 '범죄자'라는 낙인 속에 세상과 만나지 못한 채 겉돌고 있다.
햇살보금자리의 이기옥 간사는 이렇게 말한다. "쪽방 사람들은 극도의 경쟁사회가 낳은 희생자다. 삶의 고단함에 몸마저 망가진 이들을 '폐인'으로 낙인찍고 내몰기보다는 냉혹한 경쟁논리를 문제삼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들도 우리의 이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