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사랑방 후원하기

인권하루소식

하종강의 인권이야기

실업자도 노동자라는 판결

서울행정법원은 지난 1월 16일 "실업자도 노동자다"라는 지극히 당연한 판결을 했다. 그 당연한 진실을 확인하는데 우리는 너무 먼길을 돌아왔고 오랜 시간을 낭비했다.

판결의 요지는 간단하다. 노동조합법에서 '근로자'인지 아닌지를 따질 때에는 '기업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인가'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보호받을 필요가 있는 사람인가' 여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역별 노조의 성격을 가진 원고가 그 구성원으로 '구직중인 여성노동자'를 포함시킨 것은 정당하다"는 것이고 그 노조의 설립신고를 받아들이지 않은 서울시의 처분을 잘못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칫 무심하게 스치고 지나갈지도 몰라 다음의 몇 가지 사실을 지적하고자 한다.첫째, 그동안 서울여성노조는 실업자의 노조가입 권리를 요구하는 거리집회를 꾸준히 벌여왔다는 사실이다. 토요일 오후를 여유롭게 즐기는 명동거리의 시민들 사이에서 "실업자의 노조가입 권리를 인정하라"고 외치며 거리 서명을 받기도 했고, 노들장애인야간학교, 장애인실업자연대와 함께 "실업자노조가입권리를 거부하는 것은 헌법이 보장하는 단결권을 침해하는 위헌"이라고 주장하며 연대집회를 갖기도 했다. 서울여성노조의 노동자들은 법원에 소송만 달랑 제기해 놓은 채 뒷짐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둘째, 실직자의 노조 가입 권리는 일찍이 제1기 노사정위원회 합의사항이었고 정부에서도 99년 중반까지 법제화할 것이라는 입장을 진작 밝혔었다는 사실이다. 노사정위원회는 98년 9월, 구직 중인 근로자의 초기업 단위 노조 조합원 자격을 인정키로 합의했으나 정부는 재계의 반대가 거세자 11월 차관회의에서 "교섭대상이 없는 실업자에게 교섭권 등을 인정하는 것은 법률체계상 혼란을 초래한다"며 제도 도입을 보류했다.

법무부에서는 당시 실업자가 많이 늘어난 상황에서 실업자에게 노조 가입을 허용하면 실업자동맹을 구성하는 등 사회불안이 염려된다는 둥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반대 이유들을 내세우기도 했다. 그러다가, 이번 판결로 노사정위에서는 이 문제를 다시 논의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으니, 이 무슨 시간의 낭비인가 말이다. 하긴, 자본과 권력의 입장에서 보면 역사를 수레바퀴를 붙들어맨 채 그 시간만큼 번 셈이다.

이번 판결에도 불구하고 노동부는 "실업자의 노조 가입은 허용할 수 없다"고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고 있으니, 그동안 숱하게 있었던 일처럼, 하늘도 알고 땅도 아는데 노동부만 몰라라 하는 일이 되풀이되는 한, 노동부 업무보고에서 제도 개선 문제가 아무리 많이 거론되고, 그에 대해 김대중 대통령이 "노동시간단축, 전임자임금, 복수노조교섭창구 등 제도 개선 문제에 대해 빠른 시간 내에 결론을 내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해도 그 말대로 이루어지리라고 믿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하종강/한울노동문제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