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민적 정부’, 몰락으로 치닫는 마지막 몸부림
새해벽두를 뜨겁게 달궜던 총파업과 연이어 발생한 한보 비리 및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 비리사건은 ‘개혁’을 부르짖었던 김영삼 자신이 개혁의 대상임을 국민에게 확신시켜 주었다. 97년 인권상황은 급속히 추락하는 김영삼의 정권 재창출을 위한 절망적인 몸부림을 그대로 보여준다.
새벽 날치기 잠재운 총파업
96년 말 노동법․안기부법 ‘개정’안이 날치기 통과됐다. 개악된 노동법은 정리해고와 변형근로제 도입 등 노동자의 생존권을 위협하고 결사․표현의 자유를 위협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고, 안기부법은 수사권 확대 등 안기부의 권한 강화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1997년은 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총파업과 함께 시작된다. 종교인, 지식인 그리고 시민의 전폭적 지지를 받고 계속된 24일간의 총파업에는 무려 360만 명의 노동자가 참가했으며 거리는 연일 분노한 시민들의 시위대열로 넘쳐났다.
새벽 날치기를 잠재운 이 국민적 저항은 저항권의 의미를 국민의 가슴 깊이 새겼다는 점에서 인권의 역사에 남을 위대한 사건이었지만 아쉽게도 구체적인 열매를 맺지 못하고 말았다. 즉 두 달 동안의 ‘김빼기’ 후 3월에 재개정된 노동법은 노동 측의 요구보다 오히려 자본측의 요구를 더 많이 반영한 것이었으며, 안기부법은 아예 재개정도 없이 넘어가버렸던 것이다. 2월말의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 74.2%가 안기부의 개혁을 바라고 있었다.
공권력의 폭력 난무와 한총련 죽이기
공권력의 폭력은 97년의 중요한 인권문제로 기록된다. 노동현장은 물론, 공권력의 비호를 받은 ‘적준’과 같은 철거용역업체의 악랄한 폭력은 극에 달했다. 노점상인이 파출소에서 사망한 두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인권하루소식>은 ‘파출소 가기 무섭다’를 일면 헤드라인으로 뽑기도 했다(2, 12일자).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공권력의 조직적인 테러는 학생운동을 겨냥하고 있었다.
경찰에 봉쇄된 한총련 출범식 과정에서 돌출한 ‘프락치 용의자 치사사건’은 한총련 죽이기의 신호탄이었다. 6월 10일 대검 공안부는 한총련을 ‘이적단체’로 규정하고 탈퇴하지 않는 학생을 전원 구속하겠다고 공언했으며 9월 25일까지 한총련 5기 중앙대의원 1658명 중 319명을 구속하고 1333명을 탈퇴시키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이로써 한국의 학생운동은 거의 재기불능의 타격을 입었다.
<레드 헌트>와 인권영화제의 드라마
97년에는 주로 비디오로 영화를 상영하는 중․소규모 영화제들은 ‘음반 및 비디오물에 관한 법률’이 강요하는 사전심의 때문에 속속 파행을 겪고 있었다. 97년에 제2회를 맞던 ‘인권영화제’는 “검열 거부”의 입장을 견지함으로써 수난의 길을 택했다. 안기부를 비롯한 여러 행정기관은 인권영화제를 궤멸시키기 위한 온갖 압력을 행사했으며 급기야는 제주 4․3 민간인 학살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 <레드 헌트>를 ‘이적표현물’로 규정하면서 인권영화제 집행위원장 서준식 씨를 구속하기에 이른다. <인권하루소식> 1000호는 즉각 그의 구속 소식을 날렸고, 그와 별도로 모두 6번 호외를 발간했다. 수많은 시민들이 표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대열에 참여했으며 인권영화제의 곧은 원칙은 검열폐지 투쟁사에 선명한 발자취를 남겼다.
1000호를 맞은 <인권하루소식>은 큰 시련 가운데 ‘문민 5년 인권정책 평가’라는 기획기사를 무려 16번 게재했다. 이른바 ‘문민정부’ 인권의 실상을 낱낱이 해부한 이 기획은 ‘개혁’이라는 거짓된 슬로건으로 한 시대를 지배하려다 비참하게 몰락한 독재자를 보내는 한편의 장송가 그 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