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사랑방 후원하기

인권하루소식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기획기사> 학살현장을 가다 (7)

산청 학살, “지리산 자락에 산 게 죄였다”

"1949년 7월 18일 국군이 공비토벌을 위하여 출동하던 중 공비의 습격으로 출동군인이 전사한 사실이 있고, 공비의 군인습격은 주민과 공비간에 일련의 내통자가 있다는 심증을 가진 군인들이 시천면 신천리, 원리, 삼장면 평촌리 중에서 주민을 살해하였는데 이 사건과 관련된 공비는 여수·순천반란사건과 연계된다고 볼 때 어떤 면에서 군인간의 싸움에 무고한 양민이 희생된 사건으로 정확한 숫자는 알 수가 없으나 현재 유족회가 접수하여 조사반에 제출한 인원은 202명에 이릅니다." <2000년 6월 산청군의회 산청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실태보고서 중에서>

학살 현장을 안내한 서봉석 산청군 의회 의원과 정맹근 유족대표가 맨 처음 이끈 곳은 '지리산 빨치산 토벌 전시관'이었다. 서 의원은 '지리산 평화의 집'으로 부르자는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며 전시관이 철저하게 한쪽(토벌대)의 의견으로 편향된 서술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가장 큰 문제점은 "진압 명분 하에 저질러진 군의 잘못, 통비분자로 몰아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부분이 생략돼 있고, 자기 반성이 없다"는 것이다.

전시관에는 국군 및 유엔군 피해상황에 대한 통계는 있지만 지역에서 학살된 민간인에 대한 얘기는 한마디도 없다. 아니 있기는 하다. 언제 어디서 누가 어떻게 죽은 지 모르는 정체불명의 전쟁 사진 밑에 '인민군의 만행에 의해 죽었다'는 설명을 붙여 놓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랬는가.

누구나 한번쯤 오르고 싶어하는 지리산, 시원한 산세와 거침없는 맑은 물을 끼고 있는 지리산 계곡은 50여 년 전에는 좌우이념의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된 전장이었고, 산사람과 토벌대 사이에 낀 민간인들이 낮과 밤으로 고통 당해야 했던 곳이다.

49년 7월 18일, 산청군 신천면 내대리에 공비가 출현했다는 첩보를 입수한 토벌부대가 3개 트럭에 타고 출동했다. 신천리 설통바위 모퉁이를 도는 순간에 매복 중이던 당시 여순사건 반란군의 사격을 받아 토벌부대 1소대가 전멸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에 토벌대는 "지역주민들이 공비와 내통하고 있다"며 마을 주민을 학교 운동장에 모은 후 뒷동산에 끌고 가 한 구덩이에 집단 학살했다. 그 뒤에도 열 명, 스무 명 씩 사살과 방화를 통해 학살한 것이 2백여 명에 이르렀다고 정맹근 유족 대표는 말한다. 이것이 덕산·신천초등학교 민간인학살 사건이다.

"'남로당, 북로당 나오라'는 말에 그게 뭐냐고 물어보니까 '남쪽에 살면 남로당이지 뭐냐'고 하더라. 그 말 듣고 나간 사람은 다 죽었다"는 증언은 주민들의 죽음이 어처구니없는 사건이었음을 드러낸다. "그 당시로서는 그 지역에 산다는 것이 죄여서 빨치산이 먹을 것 달라면 줄 수밖에 없었고 짐 져달라면 안 져줄 수 없었다. 지서에서 시키면 그것도 그대로 했다"는 것이 주민들의 처지였다. 그야말로 지리산 자락에 산 게 죄라면 죄였다.

시린 물을 내려다보고 서있는 산청군 내대리의 '난몰주민위령비'는 "아! 아! 꿈도 아니고 지옥도 아닌 그 순간의 비명소리! 저 하늘이 울고 저 신령이 통곡하던 그 날! 시냇물이 오열하고 산새가 울부짖던 그 날!"이라 울부짖고 있었다.

산청 주민들만이 아니라 외지에서 끌려와 이름도 없이 죽어간 사람들도 있었다. 1951년 설을 지낸 후(2월 하순으로 추정된다) 군용트럭을 앞세운 버스 행렬이 산청군 시천면 외공마을로 들어왔다. 남녀노소 구분 없이 가족단위로 사람들을 실어 온 버스는 최소 11대에서 14대였고, 신흥·경북· 서울 등의 번호판을 달고 있었다. 이들 행렬은 도로에서 5백미터 쯤 올라간 골짜기(소정골)로 끌려갔다. 증언에 따르면, 이때 죽음의 위협을 느낀 민간인들이 "아저씨 좋은 곳으로 살러간다더니 이리 가면 우리 죽는 거지요"라며 울부짖었다 한다. 서봉석 의원은 이미 사망한 당시의 목격자의 말을 빌어, "구덩이 앞에 한사람씩 세워놓고 총을 쏘았다"고 전했다. 다른 학살지역과 달리 생존자가 단 한 명도 없는 이유가 바로 이런 처형방식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서 의원은 희생자의 규모가 최소 4백 명에서 최대 7-8백 명에 달할 것이라고 추정했다.

2000년 5월 발굴추진위 모임이 총 6개의 구덩이 중 1개만을 발굴했다. 1미터도 파지 않아 유골이 무더기로 나왔다고 한다. 약 150여 구의 뒤엉킨 유골들 속에는 어린아이의 것도 포함돼 있었다. 나머지 5개의 구덩이는 하얀 나무판으로 만들어진 무명비만으로 그 존재를 알리고 있을 뿐이다. 폭우로 물컹물컹한 흙을 밟고 서니 그저 포근하고 따뜻한 흙일뿐이다. 그 흙 밑에 그토록 많은 원혼이 묻혀있으리란 생각이 도무지 들지 않는다. 많은 수의 사체에서 발생되는 인 성분이 성장을 방해한 탓에 나무조차 자라지 못한다는 학살현장은 아무 말이 없다. 국회에 계류중인 '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진상규명등에 관한 법률안'이 통과되어 공식조사단이 발굴하러 올 날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 날을 기다리며 민간대책위는 사유지에 있는 학살현장이 훼손되지 않도록 땅 한 평 사기 운동을 벌이고 있다.

오늘도 지리산의 원혼들은 산 자들의 의무이행을 기다리며 위령비의 위로를 벗삼아 누워있다.

"산 사람 밤마다 옛 님 그리워 울다가 지쳐서. 오내간장 녹였네. 이제는 밝은 광명 천지 비추니. 바람티끌 가셔지고 화락한 고장. … 비노니 그 응어리 깨끗이 풀고 극락세계 훨훨 날아 이제는 안정하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