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과 미국의 책임
부산영화제가 한창이던 지난달 21일 암스테르담에서는 국제적 규모의 다큐멘터리영화제가 열렸다. 2백여 편이 넘는 작품 중에서 좋은 인권영화를 골라내기 위해 눈이 시리도록 영화를 보면서 기억에 선명한 작품들은 '폭력과 미국의 책임'을 다룬 영화들이다.
몇 년전 인권영화제에서도 소개되었던 마이클 무어의 신작 <볼링 컬럼바인 Bowling for Columbline>은 '폭력과 미국의 책임'을 본격적으로 따져 묻고 해부하는 신랄한 코미디였다. 오클라호마 폭탄 테러, 컬럼바인 고등학교 총기난사 사건, 사우스 센트럴에서 일어난 초등학생 총기사건 그리고 무역센터 테러.... 미국에서 최근 연달아 발생한 총기 사건이며 테러들이다. "라디오에서 알려주는 오늘의 날씨, 행복한 아침 식사, 다정한 키스, 스쿨버스를 타는 아이들 그리고 미국의 타국 공격 개시..." 마이클 무어가 묘사하는 '미국의 아침'이다. 컬럼바인 고등학교에서의 끔찍한 사고 후에도 미국총기협회 회장인 찰턴 헤스턴은 콜로라도주를 방문해 "미국인의 안전을 위해 총을 들자"고 소리 높인다. "내 집의 도둑은 내가 죽인다" 이것이 바로 미국인 것이다. 어디 도둑뿐인가? 미국이 저지른 (미국 안팎의) 폭력과 전쟁은 20세기 인권침해와 전쟁 리스트를 길게 늘어뜨려 놓았다.
미국의 폭력에 대한 아랍권의 대응도 만만치 않다. <고귀한 희생 Noble sacrifice>은 이란 최대 종교행사인 아쉬라를 카메라에 담은 것이다. 헤즈볼라 게릴라가 직접 찍은 자료를 차용한 이 영화는 아랍인들이 얼마나 미국에 대한 증오에 불타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 행사에 참가한 남성들은 정수리를 날카로운 칼로 긋고 계속 손바닥으로 쳐서 온 몸을 피로 적신다. 수만명이 참여한 광장은 피바다가 된다. 이들을 집단적 광기에 휩싸인 '미친 놈들'로만 치부할 수 있을까? 이들에게 이성을 되찾으라고 충고하기 전에 지난 수십 년 동안 아랍국가들에 가해진 무수한 폭력을 되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무력 침공 뿐 아니라 그들의 종교와 문화를 '반문명'이라고 몰아세우고 악마시한 무언의 폭력도 상기해야 한다.
<내 딸 없이 Without my daughter>는 영화로도 만들어진 80년대 베스트셀러 <솔로몬의 딸 Not without my daughter>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미국인 아내가 학대하는 아랍인 남편에게서 딸을 데리고 도망쳤다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솔로몬의 딸>은 사실을 완전히 왜곡한 것이라고 <내 딸 없이>는 증언한다.
걸프전에 승리하기 위해 미국은 미사일만 쏘아 댄 것이 아니다. 전쟁을 정당화하고 국민들을 전장으로 끌어내기 위해선 아랍인들은 미국이 응징해야 할 악마가 되어줘야 했다. 영화에서 한 미국인은 털어놓는다. "미국은 항상 적이 필요했다. 냉전 후에는 아랍이 좋은 대상"이었다고. 아랍인의 손에 묻은 피를 탓하기 전에 미국의 사악함이 먼저 중단되어야 한다.
(김정아 :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